‘천지개벽’과는 거리가 먼 동네에 살다 보니 상권도 그리 치열하지 않다. 상권 자체가 발달하기 힘든 여건이어서 각종 생활 인프라의 신규 진입이 적고 오랜 시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이 많다는 의미다. 이게 일장일단이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내게는 단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최근 테라스 청소에 쓸 5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를 사러 동네 슈퍼마켓에 갔다. 쓰레기봉투 한 장을 계산대에 올리며 신용카드를 내밀자 늙은 사장님 표정이 굳어졌다. “다음부터는 이 정도 살 거면 현금을 주라고.” 판매자에 대한 기본 예의도 없냐는 표정으로 그가 훈계하듯 말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나오는 것으로 순간의 불쾌함을 표현했다. 주변에 경쟁 마트가 여럿 있어도 이럴 수 있을까.
엊그제 테라스 배수구 구멍을 넓히러 온 나이 든 기사님은 “구멍이 이렇게 큰데 물이 넘칠 리 없다”는 말을 돌아갈 때까지 반복했다. 테라스에서 집 안으로 빗물이 역류한 적은 없다, 다만 여름철 집중호우 때마다 물이 제법 차올라 불안하다, 그래서 그냥 배수구 구멍을 넓히기로 했다는 설명을 여러 차례 듣고도 그는 “내 경험상 이 정도 크기의 배수구가 감당하지 못할 비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말인가. 돈 벌기 싫으면 그냥 나가시라. 짜증이 솟구쳤지만 입을 다물었다.
해열제 사면서 5세 남아가 복용해도 되냐고 묻자 귀찮다는 듯 설명서 읽어보라고 대꾸하는 약국 어르신도 있다. 보건당국 신고감이다. 약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지만 동네에서 일요일에 문 여는 약국이 이곳뿐이라 급하면 갈 수밖에 없다.
시사상식사전은 꼰대를 권위적 사고를 가진 어른을 비하하는 말로 정의한다. 같은 맥락인데, 내게 꼰대는 단정 짓는 사람이다. 개그맨 유세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 구럴 수도 있겠당’이 안 되는 사람. 쓰레기봉투 한 장 살 때는 꼭 현금을 내야 한다는 단정, 한국 날씨에서는 테니스공 지름 정도의 배수구 구멍이면 빗물이 넘칠 리 없다는 단정. 고인 물처럼 잔잔한 동네에 꼰대가 넘쳐난다.
이런 꼰대를 혐오하면서 동시에 나 역시 그 영역을 수시로 넘나드는 건 슬픈 현실이다. 정의상 밀레니얼 세대인데 정서상 그 전 세대가 익숙한 애매한 존재여서일까. 얼마 전 서른여섯 번째 생일을 보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그러려니 하며 살자고. 제발 꼰대는 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