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이들이 태어나고 얼마 동안 나의 기상 시간은 유축기 소리가 들릴 때였다.
'푸슉 푸슉'하는 유축기의 소리가 들릴 때 눈을 떠 보면 와이프는 열심히 젖을 짜 내고 있었다. 모유를 먹여야 하는 아기가 둘이니, 와이프의 일상은 젖을 짜고, 모유 하고, 다시 젖을 짜고, 또 모유 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둥이들에게 모유수유를 할 때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의 비장한 모습으로 손목에 보호대를 끼고, 수유받침대를 차고선 아기들에게 모유를 먹였다.
둥이들이 입을 오물거리면서 젖을 빨 때마다 와이프는 무언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렇게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둥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와이프와 연애를 할 때 일하던 병원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날 일을 마치고 함께 양가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에 가기로 했는데, 아직 와이프는 일을 다 못 마쳤다며 나 보고 먼저 가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서러웠는지, 밥도 못 먹고 일을 했는데도 아직 일이 더 있다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때 알았다.
와이프가 눈물이 많은 여자라는 것을.
어릴 땐 병원에 가는 것을 무척이나 무서워했다고 한다.
주사를 맞을 때면 그저 우는 수준이 아니라 병실에서 도망 다니며 의사 선생님의 혼을 빼놓을 정도라고 했다.
한 때는 엉덩이 주사를 맞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주사 바늘이 부러져서 간호사가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했던 적도 있다고 하니, 와이프가 얼마나 겁이 많았는지 짐작이 간다.
출산 마지막달에는 몸이 너무 무거워 외출은커녕 집에서도 누워만 있었다. 6kg 가까운 무게를 버텨야 했으니, 숨 쉬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다 이것저것 먹는 음식을 제한하는 까탈스러운 남편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던 와이프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즐거움 하나를 뺏긴 채로 몇 개월을 지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둥이들에게 좋지 않은 것들은 최대한 자제해 주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견뎌주었다.
둥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어떻게 키워야 할지를 걱정하던 나와는 달리 와이프는 그저 튼튼하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나만 극성 부모가 되는 것 같아 솔직한 마음을 말해보라고 추궁도 하고, 우리 애들이 꼴찌를 해도 괜찮냐는 유치하고 극단적(?) 상황을 말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이프는 쿨했다.
꼴찌는 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꼴찌를 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다만, 튼튼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 재미없는 반응에 김이 빠져서 입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와이프의 말이 맞다.
주사 바늘 하나에도 벌벌 떨며 온 병실을 도망 다니던 와이프는 수술도 잘 견뎌주었다.
수술 후 어떠한 감정에서였는지 눈물을 주르륵 흘리던 모습에 마음이 아파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떠한 마음과 감정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난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엄마의 마음'이었을 거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그리고 평생 난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딸아이가 홀로 병원에서 퇴원을 못했을 때, 와이프는 매일 울었다.
장모님과 통화할 때도, 시아버지와 통화하고, 시어머니를 만나서도, 그리고 나와 이야기할 때에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딸아이를 보러 갔다 와서도 난 차마 딸의 사진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게 사진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을 테지만 와이프도 사진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보면 울 것 같다고...
때론 냉정할 만큼 쿨하지만, 그렇게 와이프는 아주 여린 엄마였다.
출산 후에도 수술 부위가 온전치 않다 보니 제법 오랫동안 걸을 때마다 구부정하게 걷곤 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쓰라렸다.
그럼에도 씩씩하게 수유를 하러 가는 와이프의 뒷모습을 볼 때면 짠하면서도 무언가 벅찬 감정이 들었다.
작은 것 하나에 서럽게 울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 앞에 마냥 기뻐하면서 즐거워하던 눈물 많고 겁 많은 와이프가, 강하면서도 진정 사랑스러운 여자로 변했다.
그녀는,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