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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소시민 Jan 31. 2024

내 집 말고 ‘우리집’

길을 걸을 자유 (3)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를 반긴 건 밀도감 있는 습도와 적당한 더위였다. 여름의 청량함을 사랑하게 된 데다가 회색빛 겨울, 무채색이 한창인 한국이 우울해지던 차였다. 연말과 새해의 시작을 가족들이 아닌 동료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몇 년을 벼르고 별렀던 터라 고민도 하지 않고 치앙마이행을 결정했다. 혹시라도 변심할까 싶어 신청과 함께 비용도 모두 지불해 버렸다. 지불해 버린 돈 때문에라도 이번 겨울 치앙마이로의 여정은 변경되기 쉽지 않았다.


 동료들과 치앙마이에 온 목적은 명료했다. 이곳 치앙마이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초등 고학년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씹어먹는 일이었다. 전문성 있는 동료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이번 캠프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뜻깊은 일이었고 나에게도 배움이 있었던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내게 가장 큰 사유의 기회를 준 것은 ‘동네 개들’이었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시내에서 다소 떨어져 시골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한밤 중에 도착한 숙소에서 나를 맞이한 건, 사람이 아니라 덩치가 꽤 큰 개들이었다. 호텔에서 기르는 듯 보이는 개 네다섯 마리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우리를 쳐다보더니 슬금슬금 우리 일행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동네 산책을 계획했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잔뜩 볼멘소리를 하며 숙소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동네 개들의 ‘텃세’ 때문이었다. 한두 마리면 어떻게 상대해 보겠는데 이게 대여섯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면서 상당한 위협을 가하는 바람에 동네 산책은 물거품이 되었다. 알아보니 동네 개들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위험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없이 다정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 그것이 외국인이든 태국인이든 그게 누구든지 외지인들을 보면 일단 경계 태세에 들어간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꽤 든든한 가드지만 외지인들에게는 상당한 곤욕이 아닐 수가 없다.  


 태국 국민의 95퍼센트 이상은 스스로를 불교 신자라고 여길 만큼 태국은 불교 국가이다. 윤회 사상을 믿는 불교의 국가다 보니 태국인들은 동네에 돌아다니는 개와 고양이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도로에 뱀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으면 모든 차들은 뱀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내 앞에 있는 개 한 마리가 혹은 도로를 기어가고 있는 저 뱀 한 마리가 전생에서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더 나아가 저 존재들이 후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존재들에게도 선의를 베풀고 있었다.


 불교 신자가 아니지만 태국 사람들이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에 나는 씁쓸한 안도를 느꼈다. 최소한 태국에 태어난 개들과 고양이 그리고 뱀 한 마리조차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구나 싶어 안도감을 느꼈다. 동시에 목줄에 매여 단 한 번도 마을 어귀를 나가보지 못한 우리나라 시골개들이 떠올라 씁쓸했다. 집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우리나라 시골개들은 잘하면 목줄, 운이 지지리도 없으면 몸뚱아리 한 번 돌려보지 못할 작은 감옥에 갇혀 평생을 살다가 땅에 묻힌다. 내가 사는 시골 동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단 한 마리도 예외 없이 묶여 살거나 작은 케이지에서 밥이나 얻어먹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사람이 지나가면 날카롭고 매섭게 짖어댄다. 처음에는 ‘저리 가! 여긴 우리 땅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언제부턴가 ‘저 여기 있어요. 제가 여기 살고 있어요.’라고 서럽게 우는 것처럼 들린다.


그냥 같이 사는 거죠.

 

 호텔 로비로 나오니 대여섯 마리의 개들이 우리 일행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다가온다. 개들을 무서워하는 동료를 위해 호텔 관계자가 나와 개들을 쫓아주셨다. 그러면서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이 한 이야기가 참 와닿았다.


 “우리는 그냥 이 개들, 고양이들, 도마뱀들과 같이 살아요. 그냥 같이 사는 거죠. 뭔가 우리가 딱히 해주지 않아요. 그냥 우리는 우리대로 동물들은 동물대로 사는 거죠. 우리가 욕심만 안 부리면 그냥 조화롭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태국도 동물 문제 많아요. 도시에서는 반려동물을 갖다 버리는 경우도 허다해요. 동물보호소만 가도 버려진 개나 고양이들 천지입니다. 그냥 서로 같이 살아가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그냥 같이 사는 거라는 그 단순한 말에 울림이 컸다. 물론, 그 단순함을 이루기 위해 지리멸렬한 복잡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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