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사랑하는 아들 덕에 시간이 나는 대로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찾는다. 주말마다 열리는 K-리그를 관람하며 FC 서울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진짜 한국 축구를 아끼는 팬이라면, 손흥민과 이강인이 출전하는 국가대표 경기 결과에만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매주 전국 팔도 경기장에서 열리는 1부 리그, 아니 2부 리그, 3부 리그 경기를 즐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아들의 생각에 동화된 지도 오래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수도서울을 연고로 하는축구팀인데도이번 국가대표에 선발된 선수가 한 명도 없어 아쉽다는 아들의 푸념에도 이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때 FC 서울 유소년팀에 잠시 몸담기도 하고, 장래 희망란에 축구선수를 써넣기도 했던 아들 덕분에, 나는 역대 최고의 관중몰이로 인기 절정인 프로야구보다는, 축구에 더 진심이다.
FC 서울과 인천 유나이티드 간 축구 경기를 보다가, 인천 United의 응원가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노래는 2002년 15년 만에 다시 만난 김태원과 이승철이 <부활> 이름으로 발표한 기념 앨범의 1번 트랙이자, 앨범 명이기도 한 <새벽>이었기 때문이다. 침체기를 겪고 있던 두 사람에게 다시금 음악 인생의 전성기를 선물해 준 노래가 <Never ending story> 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나에겐 프런트(Front) 곡 <새벽>이 더울림이 컸다. 20년도 훌쩍 지난 시기에, 드넓은 축구장에서 합창곡 <새벽>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새벽>은 동틀 녘(dawn)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새(bird)와 벽(wall)이기도 하다. 김태원이 작사/작곡한 이 곡의 정확한 제목은 <새, 벽>이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단가는, 사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다. 어쩌면, 대한민국 축구계를 천하 통일하겠다는 그들의 바람과도 맞닿아 있다.
새가 날아오르는 머나먼 저 언덕에
희망이라는 바람이 부네
저 바다를 넘어 기찻길을 따라 새가 날아오르는 하늘을 보라
커다란 날개를 펴고 가까이 가려 해
우리가 살아온 날보다 내일이 더 길 테니.
<새벽>의 노랫말과 오케스트라 편곡은 웅장하기 그지없다. 그러나이승철의 보컬은 다른 곡들과는 달리 별다른 기교나 바이브레이션이 없다. 임재범의 표현처럼, 이승철은 그저 한 마리 매처럼 노래할 뿐이다. 마치,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에게는 벽(장애물)이 있을 리 없다는 듯.
새와 벽은 통일을 희망하는 은유(metaphor)이기도 하지만, 부족한 현실과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어느 축구팀의 응원가로도 제격이다. 문학경기장에 울려 퍼진 <새, 벽>을 듣자, 음악의 깊은 속뜻을 사람들이 잘 몰라주는 것 같다며 속상해하던 내 어린 시절의 치기도 오버랩됐다. 진가(眞價)는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고전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는 산전수전 다 겪은 60줄의 사내다. 소설이 1946년에 쓰였으니, 당시를 기준으로 그는 이미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노인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천방지축이요, 제멋대로다. 평생을 걸쳐 특별히 이룬 성과도, 벌어 놓은 재산도 변변치 않지만,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어 보인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천하의 바람둥이에, <신은 죽었다>식의 과격한 주장까지 펼치니, 소설 발표 당시 작가에 대해 신성모독 논란이 거셌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물며, 그리스는 신화의 발상지 아니던가.
그러나, <그리스인 조르바>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고전(Classic)으로 추앙받는다. 그간 여러 차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유는 자명하다. <조르바>가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한번 사는 인생, 관습과 제도 남의 이목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오늘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임을, 초로(初老)의 그리스인은 온몸으로 증명한다. 무작정 크레타섬으로 향하는 그리스인 조르바와 함께 항해하다 보면,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자유의지가 절로 솟구친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은 여전히 직접경험보다는 간접경험에 가깝다. 소시민은 차마 현실을 떠나지는 못하고, 가끔 참기 힘들 때마다 책으로 읽고, 음악으로 듣고, 영화를 보면서 위안 삼는 게 전부다. 현실의 나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도, 알렉시스 같은 그리스인도 아니기에, 깜냥껏 일구어 놓은 터를 버리고 무작정 떠날 용기가 부족할 수밖에. 하기야 종잡을 수 없이 기괴하고 남다른 사람이기에, 조르바가 오랜 시간 자유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것이리라. 2024년 대한민국을 사는 40대의 가장은 대리만족이면 족하다.
그래도, 살아갈 날들이 많기에 꿈꾸기를 멈출 수는 없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면서도, 도전은 계속하기로 한다. 그 시절 일탈의 의미로 소비되던 술과 음악, 악기연주가 이제풍요로운 인생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행여,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다 하더라도 <새, 벽>을 들으며 현실 너머의 꿈을 꿀 수 있음에 감사하다. 다만, 끝없이 비상하는 새보다는, 넘지 말아야 할 벽도 있음을 잊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높이로 주행하는 것이 나와 가족 모두의 행복을 고려한 최적의 선택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전도 시간(Time)과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
김태원과 이승철도 어느덧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또래를 살고 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불태우던 둘이지만, 여전히 통제하기 힘든 그리스인과는 달리, 그들은 한층 성숙한 한국인으로, 본인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면서 산다. 아내와 두 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라는 점, 한 밴드의 마스터라는 점, 수많은 후배 음악인의 롤-모델(Role model)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다만, 오랜 기간 서로 음악적 교류를 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을 다한 건지는 의문이다.
20세기 그리스 크레타섬에서도, 21세기 대한민국 서울과 인천에서도, 자유를 갈구하는 <그리스인 조르바>와 <새벽> 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같은 작가, 김태원 같은 작곡가, 이승철 같은 보컬리스트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는 동안 가급적 많은 흔적을 남겨야 한다. 예인(藝人)들은 하늘이 선물한 달란트(Talent)를 잘 쓸 의무가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너무 거창한 것 같기도 하다.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어서는 안 되니, 톤을 좀 낮춰야겠다.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두 거장이 함께 신곡 하나만 내면 좋겠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상암에서도 문학에서도, 남에서도 북에서도 계속 들리도록, 노래의 제목은 <새(bird) 벽(wall), Never ending story>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