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언덕을 넘어 여왕의 다리로
5일차, 팜플로나에서 푸엔테라레이나
부스럭부스럭 씨끌씨끌 새벽 일찍부터 알베르게는 짐 챙기고 씻고 움직이는 소리로 부산하다.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는 2층까지 활짝 트여있는 돔형태의 구조라서 자는 동안 저 멀리 2층에서부터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할 틈이 없고 내내 좀 선잠을 잔것 같다. 좀 피곤하지만 그래도 여정을 함께하는 수많은 동료(? 동지? 동기?) 들과 함께 새벽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은 나쁘지 않다. 잠이 깨서 마주친 옆 침대 친구들하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조용히 굿모닝 하고 인사를 한다.
오늘의 여정은 푸엔테라레이나까지 약 24킬로의 길. 아마도 순례길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일 용서의 언덕을 지나는 날이다. 도심을 빠져나오기까지 한시간여는 지루한 외곽의 길이지만, 이윽고 저 멀리 언덕이 보이면서 천천히 오르는 평원길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지평선과 수평선상의 아침햇살.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의 지형을 상상할 수 있는 평원의 길이다. 아침의 청명한 날씨와 함께 동이 트면서 비현실적일듯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워낙 똥손이라 사진은 참 못찍기 그지없지만, 용서의 언덕 가는 평원길에 찍은 사진 중에 캬 이 사진은 참 괜찮게 찍었다 라고 생각한 사진이 있었다. 구비구비 이어지는 길에서 두 사람이 멀리 나란히 걷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나중에 찬찬히 확대해서 살펴보니 그 사진의 주인공은 한국분들이셨고, 왼쪽에 보이는 뒷모습의 주인공은 나중에 레온 이후로 인연을 쌓게 될 부산의 이선생님이었다. 무심코 찍은 사진을 나중에 보면 길 위의 반가운 인연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아 이때도 이선생님과 나는 같은 날 같은 길을 걷고 있었구나.
사람의 인연이란 참 오묘하다.
언덕길을 올라 풍력발전 프로펠러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고 곧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 바람이 엄청 불고 있었다. 워낙 명소라 많은 사람들이 멈추어서 사진을 찍는다. 나도 쉬어갈 겸 사진도 찍고, 오리손에서 만난 머레이랑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한국에 영상통화도 하면서 한참 동안이나 언덕 위에 머물렀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순간이니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의 언덕에서 내려가는 자갈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다들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는데 나는 왠지 몸이 가벼우면서 요리조리 좌우로 프리스타일 스키 타듯이 잘 내려와진다. 뭐지 내가 이런 주행 퍼포먼스를 보인 적이 있었던가. 아마 짐을 동키로 보내 몸이 가벼워서 그런것 같기는 한데... 왠지 배낭 매고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오늘 평속 최고 찍겠네 하면서 조금 신나기도 한다.
왠지 모르게 필받아서 가벼워진 걸음으로 총총 걷다보니 용서에 언덕에서 앞서 내려간 머레이랑 실비아 부부도 따라잡았다. 머레이는 네덜란드에서 왔는데 유럽에서 꽤나 하이킹을 즐기는 듯 스틱을 정석적으로 잘 쓰면서 걸음걸이가 규칙적으로 빠르다. 약간 워킹머신같은 느낌? 페이스를 맞추기에는 살짝 부담되지만 오늘은 배낭이 없기에 괜찮다. 실비아는 나랑 비슷한 나이대의 영어를 곧잘 하는 상냥한 스페인 사람이고 (학교 선생님을 한다고 했던것 같다), 남편 데이빗은 배낭을 살짝 엉터리로 맨 뒷모습이 참 낙천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여정에서 몇번 더 만났으면 좋은 인연이 되었을텐데. 아쉽게도 이날 함께 걸은 이후로 실비아 부부를 다시 만날수는 없었다.
오후 1시도 채 안된 시간 꽤나 빠르게 오늘의 목적지, 여왕의 다리라는 뜻의 푸엔테라레이나에 도착했다.
9월 22일 목요일 푸엔테라레이나
오늘 걸은 길 약 24km
앞으로 남은 길 약 70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