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사람 술 사는 사람
5일차, 푸엔테라레이나
푸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는 여왕의 다리라는 뜻이다. 카미노를 걷는 방향 기준으로 마을에 진입하는 방향 말고 마을에서 빠져나가는 방향에 멋진 다리가 있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의 여왕의 다리라니, 우리의 상식에서는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무언가 낭만적이기도 하다.
1시 쯤 일찌감치 도착했으니 뭘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 점심을 먹어야지 싶었다. 스페인 식당들은 대개 2시 전후까지만 주문을 받고 이후 너댓시간의 휴식시간을 갖는다. 2시 이전에 점심 영업을 종료하는 경우도 흔하므로 보통 마을 도착하고 숙소 체크인하고 하면 시간이 꽤 되어버려 영업하는 식당을 찾기 어려울때가 많다. 이렇게 일찍 도착한 날에는 잽싸게 점심을 찾아 먹어야지.
땡볕의 마을을 조금 둘러보다가 구글맵의 평점도 괜찮고 한적해보이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영어 메뉴판은 없었지만 글자를 얼추 유추한다든지 사진번역앱을 쓰면 대강 무슨 메뉴인지는 알 수 있다. 세트 메뉴로 1코스는 일종의 야채수프, 2코스는 오징어, 그리고 후식은 샤베트를 주문했다. 음 나름 선택도 잘 했고 맛있네.
배부르게 밥먹고 나니 마음이 느긋하다. 설렁설렁 마을을 어슬렁거렸다. 마을은 긴 골목같은 구조로 되어있었고 한낮의 풍경은 참 한적했다. 그러다 어느 골목의 한켠에서 카밀라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에서 온 카밀라는 론세스부터 길에서 종종 마주 친구인데 매우 잘 걸어서 아침 일찍 치고 나가 일찌감치 숙소에 도착해 있고는 하는 에이스 그룹 중 하나이다. 걷고, 자고, 먹고, 그리는 지금의 일상이 좋다고 한다.
그는 도시마다 하나씩의 풍경을 노트에 남기고 있다고 했다. 다가가보니 오늘은 푸엔테라레이나 마을의 어느 골목 켠 고추 말리는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오... 멋진데. 도구도 예쁘고 그림도 빠르게 쓱쓱 잘 그린다. 카미노 길에서 근사한 루틴인 것 같다. 난 비록 도시마다 예술적인 활동을 할 자신은 없지만 하나씩 맛집을 찾는다든지 와인 한병을 마신다든지 하는 자신은 있는데. 그래 나도 질 수 없지 너는 그림을 그려라 나는 술을 마셔야겠다. 동네에서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정갈한 푸줏간 한켠에 주인장이 엄선한 것으로 추정되는 로컬 화이트와인이 보여 한병 샀다.
숙소에 돌아와서 간단한 주전부리와 함께 와인으로 저녁을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상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알베르게 주방을 열심히 찾아봐도 와인오프너가 없었던 것이다. 보통 여기저기 하나쯤 굴러다니기 마련인데 이게 머선 일이고. 와인을 못마시고 두고 가긴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내일 지고 갈 수도 없고 참 난감하다.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 하다가 숙소에 안톤 아저씨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안톤은 론세스바예스에서 만나 팜플로나 저녁도 함께한 나이 지긋한 멋쟁이 할아버지인데, 호주 출신의 전직 요리사다. 숙소 뒷마당 벤치에 앉아있던 안톤을 찾았다.
안톤 나 문제가 생겼어요. 와인을 샀는데 오프너를 구할 수가 없어. 혹시 오프너 있어요?
안톤 아저씨는 빙긋 웃더니 그건 내가 해결해줄 수 있지 하더니 방으로 가서 오프너를 꺼내 빌려주었다. 역시 전직 요리사는 오프너를 가지고 다니시는군요. 감동감동 그라시아스! 같이 한잔 하자고 했지만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숙소 1층 휴게실 겸 밥먹는 공간에 오징어 통조림이랑 과일 빵 등과 함께 와인을 따놓고, 오가는 사람들과 두런두런 한잔씩 먹으니 기분이 삼삼하다. 바깥의 날씨도 선선하고 좋다.
그나저나 이 알베르게는 2층 침대인데 안전바가 없다. 떨어지지 않고 잘 잘수 있을까 꽤나 조마조마했다.
9월 22일 목요일 푸엔테라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