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베리를 따먹으며 천천히
6일차, 푸엔테라레이나에서 로르카
생장에서 출발한 이후 며칠간 열심히 걷다보니 문득, 왠지모르게 어느새 전투적 경쟁적으로 걸어제끼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완주하기 위해서만 걷는건 아닌데. (사실 출발하기 전에는 혹시 완주를 못하더라도 어쩔수 없지 같은 생각이 있었지만 며칠 걷다보니 완주는 당연하다는 뇌이징에 빠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경쟁심이 생긴것 같기도 하고 어렵게 낸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출발 이후 도미토리에서만 묵으면서 잠을 푹 못잔 피로도 풀 겸 일반적인 루트보다 좀 천천히 적게 가서 개인룸 숙소에 묵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푸엔테라레이나에서 출발하면 20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에스떼야까지 가는데 그보다 훨씬 못미친 로르카까지만 가면 된다. 약 13킬로의 거리. 평소같았으면 6시반이나 7시에 출발하겠지만, 오늘은 세시간 정도만 걸으면 되고 예약해 놓은 숙소도 3시반 체크인이라 시간이 엄청나게 널럴하다. 아침에 출발하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나서 너무나 여유롭게 세상 늦장을 부리며 출발한다.
늦으니 또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일찍 출발할때는 열심히 걷는 그룹의 사람들을 자주 마주쳤다면, 이제 천천히 출발하는 새로운 얼굴들이 보인다. 모두 출발하고난 뒤 텅 빈 알베르게도 새롭다. 아침식사도 1시간쯤 지난 바에서 하는게 아니라 아예 출발할 때 마을에서 하니 느긋하다.
어제 깜박하고 미처 간판 사진을 못찍은 멋진 와인을 팔던 푸줏간 입구도 찍을 수 있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 마을 이름의 유래라는 여왕의 다리가 보인다. 웅장하다기보다 시간이 켜켜이 예쁘게 퇴적된 돌다리다. 아침 햇살과 함께 반짝이는 풍경.
다리 사진을 찍고 있는데 수레를 끌고 노부부가 지나온다. 배낭을 매는 대신 수레에 짐을 싣고 카미노를 걷고 계시나보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시기에 한국 관광객스럽게 가로 세로 여러가지 구도로 한 열장 찍어드렸다. 여러 장 찍는 모습을 보더니 포토그래퍼! 하며 좋아하시네. 영어를 못하는 스페인 부부이신지 말은 안통하지만 따봉을 날려드렸다.
마을을 나서 길도 느긋하게 걸었다. 천천히 가다보니 길가의 풀들이며 풍경, 여러가지가 더 잘 보였다. 특히 어제 안톤아저씨가 얘기해준 블랙베리가 지천에 깔려있다는걸 깨달았는데 먹어보니 상당히 맛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산딸기나 오디 계열인데 약간 마른애들을 먹어보면 건포도나 건자두스럽게 단맛이 강하다.
그렇게 보다보니 스페인 달팽이들은 얇은 가지에 다닥다닥 많이도 붙어있는것도 보이고 여기 솔방울은 엄청 크다는 것도 봤고, 우리나라랑 생긴건 좀 다른 밤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로르카까지 가는 길에는 포도밭이며 올리브밭 등이 쭉 펼쳐져 있는데 그중 재미있는 곳이 있었다. 올리브밭 한켠에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공간을 꽤나 예쁘게 꾸며놓았다.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음식 코너도 있어서 목을 축이고 빵이나 과일로 간단한 요기도 할 수 있다. 아저씨(청년?) 한 분이 운영하시는 듯 했다. 장소가 흥미로워 배낭을 내려놓고 쉬어갈 겸 둘러보는데, 오늘 오전에 마을에서 늦은 아침 먹을때 만났던 인도계 미국누님 아눈아줌마와 채리사도 도착했다. 아눈은 아주머니 특유의 오지랖과 넉살로 주인장에게 이런곳은 어떻게 만들었냐 하고 물어본다. 주인장은 여기 올리브밭을 조금씩 사서 넓히고 있고 순례자들이 쉬어갈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뭐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새 몇몇 사람들이 모여 들으며 와우 임프레시브 스토리텔링이 너무 좋다 그러면서 감탄을 했는데 사실 나는 백프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이렇게 걷는 이들을 환영해주는 공간을 애써 만들어주고 가꿔주는건 참 고마운 일인 것 같다.
어떤 마음일까? 알듯 말듯 하다.
쉼터를 지나 얼마 안가 오늘의 목적지인 로르카에 도착! 부킹닷컴에서 미리 예약한 멋진 숙소 카사 나히아를 찾아갔다. 이곳은 그제쯤이었나, 경로상 어디서 묵을까 구글맵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곳이다. 평점이랑 리뷰가 너무 좋길래 대체 뭐지? 하는 마음으로 살펴보고 리뷰도 보고 하다보니 이미 내 손은 예약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생장 이후 계속 공용숙소에만 있었어서 마침 하루 푹 잘 시간도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숙소는 주인장인 라울 부부가 운영하는 펜션이랄까 비앤비같은 곳인데 매우 만족스러웠다. 새로지은 건물은 주변과 어울리면서도 설비나 내부는 모던하고, 곳곳에 주인장들이 공들여 세심하게 관리하는 흔적이 묻어난다.
예를 들면 이런 디테일들이 인상적이다.
- 공용공간의 좋은 음악과 적당히 조용한 음량, 전체적인 향기
- 공용공간에 각 방별로 테이블과 냉장고를 각각 따로 제공 (방 번호가 표시되어있음)
- 방안 티비를 틀면 넷플릭스가 나오는데 각 방 호수별로 계정이 있고, 무선 헤드폰도 제공
- 자동 블라인드, 콘센트 위치, 등등...
주인장이 돈벌려고 한다기보다 진짜 애정으로 운영하는 곳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1층의 분리된 공간은 주인장이 사는 집이기도 하다. 마치 카미노 중 하루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면서 조용히 쉬어가는곳이라는 걸 공간 자체로 표현해 놓은듯, 작지 않은 영감을 주는 곳이었다. 가격도 약 70유로 선으로 알베르게에 비하면 비싸지만 호텔이나 단독룸으로 생각한다면 괜찮다.
간만에 깨끗하고 독립적인 공간에서 마음 편히 쉬니 넘나 좋구나... 불 까맣게 꺼놓고 코고는 소리 없이 푹 잘수 있겠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너른 마음씨의 올리브 쉼터 주인장과 섬세한 아름다움의 펜션 주인장 두 명을 모두 만난 날이었네.
9월 23일 금요일 로르카
오늘 걸은 길 약 13킬로미터
앞으로 남은 길 약 680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