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도시에서 반쯤 쉬는 하루
7일차, 로르카에서 에스떼야
잠이 깼다.
모처럼 나홀로 있는 방에서 눈을 뜨니 조금 낯설군. 엄청나게 조용하고 깜깜하다. 어제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었는데 푹자려고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었다. 10시도 안되어 잠자리에 들기도 했고 워낙 고요해서 새벽에 깼다고 생각했는데,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7시. 와 세상 푹잤네. 평소에 부산한 알베르게의 도미토리 침실에서 자의반 타의반 5시반에서 6시에 일어나는 걸 생각하면 완전 숙면했다. 오늘도 부담없는 일정이기에 느릿느릿 여유롭고 한가롭다. 하루 머문 로르카의 멋진 숙소는 아침의 풍경도 평화롭고 아름답다.
씻고 아침 먹고 커피한잔 타먹고 숙소밖 풍경을 좀더 감상하다 10시가 조금 안되어 여정을 시작했다. 오늘은 에스떼야까지 두어시간만 짧게 걸으면 된다. 보통 하루만에 오는 구간을 이틀에 걸쳐 걸으니 이틀 모두 여유롭다. 출발 일주일쯤 되었으니 에스떼야에서 하루 쉬어갈까도 생각하다가, 쉬지는 않고 이틀에 나누어 조금씩 걷고 쉬고 하는 중이다. 하루 연차를 쓰는 대신 이틀 연속 반차를 쓴다고나 할까? (사실 운동도 안하고 스트레스만 받으며 살아온 비루한 몸뚱이는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긴 하다)
오늘의 길은 꽤나 짧아서 특히 인상적인 구간은 별로 없었는데, 전체적으로 평탄하고 평화로운 길이었다. 무화과 나무에서 무화과를 따먹기도 하고 (완전 신선하다) 들판의 오래된 교회랄까 기도원 건물이 보이길래 잠시 들어가기도 하면서 왔다. 오래된 교회 건물에서는 평안한 여정과 엄마의 건강을 기도했다.
두시간여만에 도착한 에스떼야는 골목골목이 정겹고 예쁜 강이 있는 작은 도시.
Estella니까 스텔라 = 별이라는 뜻이다. 여왕의 다리 마을을 지나서 별 도시로 오다니 스페인은 작명이 엄청 로맨틱하군. 작다고는 해도 도시라 순례길에 스쳐 지나가는 작은 마을들에 비할 바는 아니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다.
오늘은 주말이라선지 축제인지 사람들이 많고 벼룩시장같은것도 펼쳐지고 있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한 뒤 점심 사먹고 어슬렁어슬렁 마을 구경하고 돌아와 낮잠도 잤다. 단잠을 자고 일어나 내려와보니 호스텔의 부엌이 나름대로 음식을 해먹기 괜찮을 것 같다. 그래 마트에 가자. 가까운 마트를 검색해 찾아갔다. 스페인 마트 물가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싼것 같다. 이렇게 싱싱한 토마토 1킬로에 2유로도 안하다니 너무 관대하지 않습니까 사장님? 안살래야 안살수가 없다. 토마토라면 역시 토마토 계란 볶음이지. 시금치랑 계란도 사고 신나서 화이트 와인도 한병 샀다.
뭐 토마토계란은 실패하기가 힘들다. 가스렌지를 켜고 올리브유에 빠르게 볶아 순식간에 완성! 마침 부엌에는 쉽게 보기 힘든 젓가락도 있다. 와인 한잔에 토마토시금치계란볶음을 젓가락으로 집어먹으니 꿀맛이다. 심지어 건강에도 좋은 느낌이잖아?
맛있게 먹고 설겆이를 하는데 부엌에 다른 순례자 둘이 파스타를 해먹으러 들어왔다. 와인 한병은 너무 많아서 두어잔만 마시고 냉장고에 넣어놨었는데, 그분들에게 여기 와인 있으니 혹시 필요하면 꺼내서 마시라고 했다. 식사 준비를 하던 중년의 여성은 아유슈어? 하면서 반색이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니 중년의 여성은 네덜란드에서 온 산드라, 남자분은 영국인 리차드다. 영국인이지만 주로 프랑스에서 살았다고 하고 통신사 오렌지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오 내 친구 삼성다니고 유럽에 파견 많이 오는데 친구의 고객님이시군요. 얼떨결에 그분들이 만든 파스타도 얻어먹으며 숙소 공용 휴게실에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역시 사람은 밥상머리에서 친해지는게 최고인가보다.
매우 평화로운 하루. 8키로밖에 안 걸어서 그런 걸까. 오늘 예약한 숙소 호스텔 아고라도 참 깔끔하고 조으다. 방심했는지 하루종일 사진도 별로 안찍었다.
9월 24일 토요일 에스떼야
오늘 걸은 길 약 8킬로미터
앞으로 남은 길 약 670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