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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히 Sep 09. 2018

7. 뮌헨에서 보낸 생일

독일 로맨틱가도 여행 : 뮌헨 

내 생일은 6월 13일이다. 생일이라는 날을 특별히 대하지 않으려고 굳이 노력했던 시간이 길다. 내 생일은 시험기간일 때가 많았고, 가족들과 떨어져서 보낼 때가 많았기에, 생일날이 오면 할 것도 많아 죽겠는 조급한 상황에서 괜히 사랑받고 싶은 감정을 치우느라 에너지를 많이 썼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조금씩 달라졌다. 예성이라는 가족이 내 옆에 붙어있는 덕이다. 학생 신분이 끝나 시험기간이 없어진 덕도 클 것이다. 여러 덕택에 생일을 소중히 보내고자 작정하는 일을 어린 시절 이후로 다시 오래간만에 하게 되었다. 

마침 여행을 계획할 당시 올해 나의 29번째 생일을 뮌헨에서 보내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설레었다. 생일날 가고 싶은 곳을 구글 지도 속 뮌헨 시내 곳곳에 별표 해 두며 조금은 특별한 생일을 보낼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고, 그런 인생을 뼈저리게 배운 게 이번 여행이었으니. 
생일 아침 비 오는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생일날을 실감하기에는 그 전날 뮌헨 경찰서에 다녀온 여파가 컸다. 눈을 뜨자마자 사라진 짐 생각이 났다. 뮌헨에 올 때까지는 오지 않은 우리 짐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나와 예성은 옷 두 벌로 여행을 연명하고 있었다(그간 올린 여행기를 보면 모든 사진에서 분홍색 옷 두 벌로 돌려 막기 하고 있는 날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뮌헨 경찰서까지 가서 우리 짐이 완전히 분실된 것을 확인했다. 더 이상 없는 짐을 막연히 기다릴 수도, 부족한 옷과 별거 없는 물품들로 남은 70여 일의 여행을 불편하게 지속할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뮌헨에서의 여행을 포기했다. 다음 행선지인 이탈리아 나폴리로 떠나기 전에 남은 여행에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뮌헨의 쇼핑몰을 휘젓고 다녀야 했다. 어차피 쇼핑몰 안에만 있어야 할 하루였는데, 비가 오니 위안이 되었다. 날씨가 좋았으면 눈물 나게 아쉬웠을 뻔했다. 

숙소와 가까운 쇼핑몰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보니 카톡이 많이 와있었다. 멀리 떠나 소식도 잘 없는 한 친구의 생일을 기억해주고 축하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의 메시지였다.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우리의 짐과 남은 여행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축하 메시지에 답하며 '생일이구나'하는 실감이 좀 났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내 생일의 주요 일정이 쇼핑'이 됐다. 사고 싶은 걸 사는 쇼핑이었다면 마음이 좀 덜 우울했겠으나, 이미 한국에서 다 준비해왔던 것을 다시 사야 하는 쇼핑이었기에 마음이 복잡했다. 우리가 이렇게 쓰는 돈은 항공사에 보상을 요청하겠지만, 그 보상을 반드시 해 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게 바로 쇼핑몰로 갔으면 내 인생 우울한 생일 TOP 3 중 1위가 됐을 것이다. 

그래도 생일이니까 이 와중에 브런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가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을 참 좋아한다는 걸 아는 예성이는 내가 나갈 준비를 하는 뒤편에서 열심히 카페를 물색했다. 예성이를 믿고 무작정 걸어갔다. 예성이가 찾은 '
Cafe Schuntner'라는 곳은 시간이 쌓인 오래된 느낌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카페였다. 



절약 대왕 예성이가 웬일로 먹고 싶은 거 다 시키라길래 신이 나서 진짜 다 시켰다. 예성이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그 사이에 모든 음식이 빠르게 나왔다. 허기진 탓에 당장 흡입하고 싶었지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참았다.



화장실에 왜 이렇게 오래 있지 생각할 즈음, 예성이가 꽃을 들고 나타났다. 카페를 찾으면서, 카페 근처에 있는 꽃집도 찾는 기특한 짓을 했다는 거다. 꽃을 받으니 흐릿했던 마음이 싹 갰다. 언젠가 예성에게 장미나 작약 같은 고급스러운 꽃과 들풀 같은 계란 후라이 색감의 꽃이 같이 있는 게 좋다고 말했었다. 내 말을 기억해 준 예성이의 따뜻한 마음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예성이가 꽃을 줄 때의 표정은 늘 '쑥스러움'이다. 남자다운 낭만과 박력이 느껴지는 표정이 아니다. 나는 그 쑥스러운 표정이 참 좋다. 예성이가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지금 같은 발그레한 표정으로 내게 꽃을 주었으면 좋겠다.  



아까부터 나와있던 음식이 식어가도 상관없었다. 예성이는 자신이 말도 안 통하는 독일 플로리스트와 바디랭귀지를 통해 이 꽃 조합을 완성했다는 무용담을 얘기하느라, 나는 그런 예성이와 꽃을 사진 찍느라 한동안 배고픈 것도 잊었다.



내 시선이 잘 닿는 곳에 꽃다발을 뉘어두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 직원분이 다가와 물을 담은 병을 웃으며 건네주었다. 원한다면 꽃을 이 병에 잠깐 꽂아두어도 좋다고 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친절에 나도, 꽃도 활기가 돋았다.


음식을 싹 비운 뒤 마지막 노른자만 남겨두고, '아, 너무 기대되는 순간이다.' 하는 예성이가 귀여웠다.



이 카페에 앉아 여행 처음으로 색연필을 들었다. 여행 중 틈날 때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생각지 못한 사고로 그 틈을 찾기가 참 힘들었다. 어색한 그림을 끄적거리며, '이번 생일 참 마음에 들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예성)과 좋아하는 공간(카페)에서 좋아하는 것을 받았고(꽃), 먹었고(브런치), 했다(그림).


꽃은 뮌헨 숙소에 꽂아두고 왔지만, 꽃다발에 붙어있던 태그를 간직하고 있다.


이 공간에 한동안 머물다가 쇼핑몰로 향했다. 사실 시간의 양으로 따지면 쇼핑몰에서 대부분의 하루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이 카페에서의 시간이 '뮌헨에서 보낸 내 생일'의 장면으로 남아있다(쇼핑몰은 기억이 잘 안 난다. 사진도 없다.). 그리고 그 장면은 넘치게 소중하고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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