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임산부 이야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20년 2월 18일, 난 오늘로 출산 예정일을 꽉 채우고도 2일이 지난 만삭의 임산부다. 내 뱃속 결이는 아직 세상에 나올 생각이 없는듯하다.
지난 282일을 임산부라는 새 정체성을 갖고 살았다. 경험도, 상상도 못 했던 수많은 변화들에 정통으로 맞아 혼미한 열 달을 보냈다. 만삭의 임산부에게는 아이가 몸 밖으로 나올 그때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기에, 혼미했던 임신기간을 찬찬히 돌아보며 '도대체 언제 나올까' 싶은 초조함을 달래보려 한다. 가장 고통스럽다는 진통을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게 될 줄이야.
임신기간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니 주로 고통 위주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기 연민이 짙은 글을 쓰는 건 경계해야 한다는데 내가 겪은 임신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그렇게 딱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한껏 자기 연민 가득한 기록이 될 것 같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은 2019년 6월 6일이었다. 결혼 4년 차가 되는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종종 해봤지만 한 번도 두 줄을 본 적이 없었다. 휴일이라 예성이와 느긋하게 시작한 그날 아침도 나의 직감은 왠지 무조건 ‘한 줄’이었다. 어차피 아니겠지만 테스트기를 안 한 지도 꽤 됐고, 확실히 알아야 마음 편해질 것이기에 확인이나 해보자는 심보로 테스트기를 해봤다. 무슨 증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공휴일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며 건조한 마음으로 테스트기를 봤다. 누가 여자의 직감이 무섭다고 했는지. 나의 직감은 보기 좋게 틀렸고 내 눈앞에는 빨간 두 줄이 떠 있었다.
"미쳤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믿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테스트기를 한 번 더 했다. 역시나 두 줄이었다. 그때부터 미쳤다 미쳤다 거리며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나와 예성이 인생에 큰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우선 다른 방에 있는 예성이에게 알려야 했다. SNS에서 남편들이 아내의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의 반응을 담은 영상을 종종 봤었기에, 나도 그런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나 자신조차도 이 임신에 대한 반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예성이의 반응을 기록할 것에 마음이 더 급했다. 이런 기록에 대한 집착은 좀 병인가 싶다.
휴대폰 영상 녹화를 튼 뒤 상기된 표정으로 예성이를 불렀고, 예성이에게 테스트기를 내밀었다. 놀란 예성이는 '이거 임신이야?', '이거 임신이지!' '이거 임신이잖아!', '이거 임신이야!'를 연신 외쳤고, 흔들리는 동공 위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게 빤히 보였다. 어디서 본 건 있기에 나를 안아주며 축하를 나누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팔을 뻗는 예성이의 몸짓은 많이 굳어있었다. 나 역시 내가 느끼는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라 예성이를 보며 울듯이 웃기만 했다.
집에 임신 테스트기가 구비되어 있을 정도면, 임신이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일은 아니었는데 우린 왜 그렇게 어버버 거렸을까.
결혼 4년 차가 되기까지 임신에 대해 별생각이나 고민도 없었다. 둘이 함께하고 싶어 결혼했고, 둘이 있는 시간이 날마다 재밌었다. 어디에서 뭘 하며 살지가 정해지지 않은 불안을 안고 시작한 결혼이었는데, 둘이서는 견딜만한 불안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다면 그 불안이 미안함이 될 것 같았고, 그 미안함은 무거웠으므로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퇴사 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어떻게든 해보려는 시간을 헤매고 있었기에 나의 새로운 경력을 다지는데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적어도 내 일에 대한 첫 단추는 잘 끼우고 난 뒤에 임신을 해야 경력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혼 후 내가 백수가 되고 예성이가 일을 하고, 둘이 백수가 되어 80여 일의 여행을 갔다가, 예성이가 백수면서 내가 일을 하는 팀플레이를 해냈다. 그리고 결국 예성이가 오래 일할만한 직장과 우리가 한동안은 이사 가지 않아도 될 집이 정해졌다. 결혼 4년 차가 되는 동안 다섯 번의 이사를 하며 도착한 곳이었다. 그때까지는 떠날 날을 받아놓은 떠돌이로 여행지에 살 듯 생활을 해왔다면, 이제는 우리의 동네가 생긴 기분이었다. 수많은 변수들이 정돈되자 남의 일 같았던 임신이 슬슬 우리의 일처럼 다가오긴 했다. 하지만 의무감이나 조급함으로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결심과 과정이 자연스럽길 기다렸다. 그러다 2019년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 예배 때 처음으로 '임신'이라는 기도 제목을 예성이와 함께 적었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보다는 그전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던 임신에 대해서 이제 기도로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던 것이다.
준비하고 싶은 마음. 딱 거기까지가 우리의 상태였다. 평소 생리 불순이 심하고, 스트레스를 조금만 받아도 생리를 건너뛰기 일쑤였기에 배란일을 맞춰 임신을 시도하는 등의 노력은 내게 어려운 일이었고, 그렇게까지 할 열정도 없었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피임을 했으니 임신이 어려울 거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임신에 대한 마음의 준비보다는 임신이 되기까지 오래 걸릴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사실 임신 전에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에 오히려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점에 안도했다. 임신을 원해도 되지 않을 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흐릿하게나마 알고 있었어도, 미숙한 나는 내가 겪어보지 않은 고통에 대해 줄곧 자만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임신이 턱 된 거다. 긴 고민 끝에 여행지를 결정하고, 이제 슬슬 여행 준비를 해볼까 하는 시점이었을 뿐인데 정신 차리고 눈 떠보니 이미 그 여행지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해 있는 기분이랄까. 짐을 싼 기억도 없고 여행 계획을 짜지도 않았는데 이미 비행기는 이륙했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때와 방식이 아니었고, 그게 덜컥 겁이 났다. 감사해야 할 일이란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겁이 감사함을 잡아먹었다.
부모님께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가 돼서야 이게 기쁜 일이라는 게 처음 와 닿았다. 세미나로 포르투갈에 계셨던 엄빠에게 영상통화로 임신 사실을 알리자, 엄마는 물개박수를 치고 아빠는 눈물을 닦았다. 완전 초기일 때라 유산 가능성도 있으니 비밀이라고 했는데 아무 소용 없었다. 아빠는 그날 함께 있는 모든 동료들에게 딸아이가 임신을 했다며 커피를 쐈다고 한다. 평소에 낯가리는 사람이 그런 오지랖을 떨다니, 아빠의 흥분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갔다.
엄마 아빠가 손주를 기다리는 티를 크게 낸 적이 없었기에(언젠가부터 두 분이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애청자가 됐다는 지점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나?), 손주 소식을 간절히 기다려오셨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내게 티 내지 않고 꾹꾹 넣어두고 계셨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굳이 하지 않고 삼키는 말들, 그 묵묵한 기다림의 시간이 커다란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 이후 사람들에게 임신했다는 얘기할 때마다 분에 넘치는 축하를 받았다. 원했던 속도보다 몇 박자 빨리 임산부가 되어 아무 준비를 하지 못한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 언어를 배우듯 사람들의 축하를 차근차근 받으며 '아, 이게 축복받을 기쁜 일이구나.'를 천천히 입력했다.
내가 생각했던 때가 아닌 어느 날, 내 몸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 사람이 뱃속에 있을 동안의 이름은 ‘결’이라 지었다.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결'실이자, 이 아이의 삶의 '결'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평소 스스로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높다. 몸도 마음도 풀어두면 한없이 무너지는 사람이기에 시스템 안에, 사람들 안에, 규칙과 수단 안에, 목표 안에 스스로를 단단히 붙들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안심이 된다. 그걸 나쁜 것이라 볼 수는 없지만, 조금 과한 나머지 온몸과 맘에 힘이 과하게 들어간 채로 살아가는 편이다. 잔뜩 들어간 힘이 나를 망가뜨리는 요인이라는 걸 몸소 아프며 알게 됐지만, 이제는 힘을 좀 빼고 살고 싶어도 깊게 배인 삶의 습관이 결심만으로 바뀌지 않았다. 임신 사실을 온전히 환영하지 못했던 이유도 내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신은 내 맘대로 완벽하게 다 하고자 높은 컨트롤타워에 올라가 있는 나를 몇 계단은 내려오게 했다. 스스로를 통제하려던 힘이 스르르 빠졌다는 뜻이다. 내 인생이 내 맘대로 되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인정하게 된 과정은 아팠다.
임신 사실을 알고 얼마 뒤 생일이었다. 데이트를 준비하며 오랜만에 화장대에 앉아 정성 들여 화장을 하다가 문득 우울해져 버렸다. 내년 생일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상상 때문이었다. 지금보다 살이 후덕하게 찐 채로 펑퍼짐한 예성이 티셔츠를 입은 채 거울 앞에 서서 탄력 잃은 피부를 걱정스레 들여다보는 모습이 그려졌다. 내 몸이 임신 후에 중고 상태로 바뀌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울적해도 내 몸에 닥칠 무수한 변화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걸 실감한 첫날이었다.
임신 6주 차부터 22주 차까지, 약 4개월 동안 입덧을 했다. 처음엔 먹덧이란 게 왔다. 속에 음식이 비면 참기 힘든 메슥거림이 몰려오는지라 공복 상태를 두려워하며 계속 음식을 넣어줬다. 잠에 들어도 속이 비면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이 울렁거려 잠에서 깼다. 결국 소파에 앉아 쪽잠을 청하며 중간중간 귤, 방울토마토, 아이비, 새콤달콤, 사탕 등을 약인 것 마냥 꾸역꾸역 입에 넣으면서 밤을 보냈다.
그래도 먹덧은 먹으면 된다는 해결책이 있으니 '이만한 게 어디야' 하며 감사를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2주 정도 지나자 토덧이 시작되고 말았다. 매일 아침 변기를 붙잡고 모닝토로 하루를 시작했다. 토를 한 번 하면 피가 날 때까지 토가 나왔다. 이 피는 위에서 나온 피인지 식도에서 나오는 피인지 알 수 없었지만, 피를 봐야 토가 멈추니 토하며 피를 기다리는 지경이었다. 토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극심한 뱃멀미 상태였다. 즉 토를 할 것 같은 상태 아니면 토를 하는 상태 둘 중 하나로 살았다.
먹으면 토하고, 안 먹어도 토하는 내 몸에 장단 맞추기가 어려웠다. 내 몸의 패턴을 찾아 고통을 통제하고 싶었으나 뭘 해도 괜찮아지지가 않았다. 그나마 '먹을 수 있겠다'라는 싶은 음식은 라면이어서, 거의 매일 라면 반개를 먹었다. 보통 임신을 하면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고 애쓰지만 나는 임신을 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불량한 식생활을 했다. 수평으로 누우면 구토감이 올라와 잠도 앉아서 자야 했다. 소파에서 자다가, 부모님으로부터 안마기와 세트인 살짝 눕혀지는 간이의자를 빌렸다. 그러다 보니 허리가 망가져갔고, 나를 불쌍히 여긴 친구 부부가 1인용 리클라이너 소파를 빌려줬다.
한 일주일 정도면 참겠는데 4개월이었다. 2019년의 여름이 입덧과 함께 통으로 사라졌다. 살면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육체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꼈던 적이 없었다. 만삭까지 입덧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것에 비하면 나은 거겠지만, 입덧을 겪으며 느낀 건 이 세상 어딘가에 나보다 더 큰 고통이 있다는 사실이 내 고통을 1도 작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거다. 나보다 입덧을 짧게 한 친구는 내 앞에서 자신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민망해했다. 나는 친구의 민망함을 강력히 취소시키며, 너의 힘듦은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굳이 객관화한 자신의 고통의 세기가 남보다 작다고 해서 덜 힘든 게 아니라며 괜히 열을 올렸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언제 끝나는 줄 알면 견디기가 수월했을 텐데, 그 끝을 모르니 망연자실한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불 꺼진 안방에서 하루하루를 지워갔다.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지웠다. 원래 햇빛을 좋아해서 해가 들어오는 오전 시간에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할 일을 하곤 했으나, 그때는 햇빛의 눈부심이 짜증 났다. 꽃을 보며 행복을 느꼈는데 이제 꽃을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삶의 활력을 위해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을 수집하던 내가 아름다움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4개월 동안 내가 한 것은 불 꺼진 어두운 안방에 누워 넷플릭스를 지겹게 보는 것이었다. 세상 모든 드라마와 영화를 다 볼 기세였다. 한국, 미국, 영국을 넘어 중국까지 진출했다. 수동적으로라도 무언가에 몰입하는 게 시간을 보내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안 하던 스마트폰 게임까지 깔았다. 혼자 있을 때는 애니팡을, 예성이와는 모두의 마블을 했고, 전자파에 지칠 때는 예성이에게 토할 거 같으니 당장 고스톱 쳐야 한다고 했다. 이 시간을 하고 싶었던 일과 해야하는 일을 하며 생산적으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간절히 했지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뱃멀미가 몰아쳤고, 진통제를 투여하듯 급하게 넷플릭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는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는 게 부끄러웠다. 내 몸인데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게 숨 막히게 답답하고 분했다. 하지만 그 분도 나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움직이는 상태를 좋아하는 나는 때때로 무기력한 사람들을 만나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만 애쓰면 될 텐데 왜 저 자리에서 한 발짝을 나아가질 못하는지 답답해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꼼짝도 못 하겠는 극강의 무기력함을 몸소 경험하며 그동안 함부로 생각했다는 걸 인정했다.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게 고통으로 여름이 삭제되니, 가을이 올 무렵 다행히 지겨운 입덧도 드디어 끝이 보였다. 하지만 임신은 양파 까듯 새로운 고통을 만나는 여정이었다. 점점 배가 부르자 하얀 내 배 한가운데를 거뭇한 임신선이 가로질렀고, 매일 튼살크림을 발라도 튼살이 생겨버렸다. 뱃속 결이가 커지면서 위장을 누르는지 위산 역류가 심해 목구멍이 항상 쓰렸고, 역시나 누워 자기가 힘들었다. 방광도 눌려 밤낮없이 1시간에 한번 꼴로 화장실을 가야 했고, 꿀잠과는 계속 이별이었다. 그 외에도 억 소리 나게 아파 걸을 수도 없는 환도선다, 치골통이 이어졌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찼다. 몸이 무거워질수록 혈액순환이 안 되어 손발이 저렸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이 입덧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군소리 적게 하며 겪었다. 생각지 못한 입덧의 효과였다.
맘대로 할 수 없는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라는 새 역할은 내가 사는 온 세계를 바꿀 거라 했다. 머무는 공간도,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생활 루틴도, 시간을 쓰는 우선순위도 다 달라진다고, 겪어본 모두가 그랬다.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미리 겁먹기 싫었지만, 다들 예고하는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솔직히 무서웠다. 밀려드는 변화가 지금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무참히 쓸어가 버리진 않을까. 변화의 물결에 특히나 쓸려보내고 싶지 않은 것은 '나의 일'이었다.
사람마다 '일'에 두는 무게와 의미는 다를 것이다. 나는 ' 하고 싶은 일'이 없어, 도대체 그게 뭔지 무척 궁금해하다가 스트레스까지 받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이었다. 결국 그 세월이 쌓은 고민의 두께만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차지에는 중요도가 큰 어른으로 자랐다.
하고 싶은 게 없던 어린 시절은 무미건조한 회색으로 사는 것 같았다. 회색을 벗어나 내 고유의 빛깔을 찾기 위해 갖가지 노력과 삽질을 해왔다. 독특한 교육 경험을 제공하는 이곳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걸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집에서 두 시간 떨어진 기숙형 대안학교에 입학했고, 가족의 울타리를 14살부터 떠나 다채롭고도 치열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교에 가서는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하면서 날 가둔 세계를 넓히고 싶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들 중에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안 할 것 같은 일들 중에 연극이 걸려들었고, 어쩌다 보니 전공으로까지 선택했다. 다행히 연극을 하면서 난생처음 '하고 싶은 것'의 씨앗이 내 안에 뿌리를 내렸고, 그 뿌리가 '사람'과 '예술'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화됐다. 대학 졸업 후에는 '사람'과 '예술'을 아우르는 일을 찾기까지 두 번의 퇴사를 했다. 내 몸과 마음을 쏟아부을만한 세 번째 직장을 만났고, 그 직장에 다니기 위해 서울에서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한 뒤에도 주말부부를 하며 일에 열중하다 스트레스로 오른쪽 안면이 마비됐다. 얼굴도 멈춘 김에 습관적 달음질도 잠시 멈춰봐야겠다는 생각에 퇴사를 하고 남편이 근무 중인 시골에서 살게 됐다. 내 삶의 속도가 간신히 차분해지니 '하고 싶은 일'을 향한 지난 여정을 돌아볼 수 있었고, '그림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싶다'라는 솔직한 바램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사실 늘 하고는 싶었지만 잘할 자신이 없어서 내 길이 아니라고 치워두었던 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못 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해졌다. 내가 다니고 싶을 만한 회사가 없는 낯설고 작은 도시에 살고 있으니 다른 선택권 없기도 했다. 잘 할 자신이 없더라도 하고 싶었던 일을 10년은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래서 홀로 앉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이 내 고유의 빛깔을 찾기 위해, '하고 싶음'에 반응하는 근육을 예민하고 성실하게 움직였던 시간들이다.
서른 즈음 되면 무언가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지망생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없던 내가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진실하게 답하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내 오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 믿었다. 어렵게 찾은 답인 만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덜컥 조급해졌고, 지금 당장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욕심으로 초조해졌다. 올해 안에는 그럴듯한 책 한 권을 완성해내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런 나에게 모두가 잘 하고 있다고 했고, 스스로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임신하니 이전과는 다른 톤의 말들이 들려왔다. 이제는 이전처럼 살 수 없다고, 육아와 일 둘 다 잘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불가피할 거라고 했다. '할 수 있다.'는 말들 대신 '할 수 없다.'는 말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쏟아졌다. 하고 싶은 일을 간신히 찾고, 이제 차근차근 노력해보려는 순간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된다니 당황스러웠다. 넘어지고 찢겨가며 열심히 산을 올랐는데, 고지를 눈앞에 두고 힘 좀 내보려 하자 그동안 잘못된 산을 올라왔으니 더 올라가 봐야 소용없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 삶의 중요한 가치이긴 했지만,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배운 적은 없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 약 16년 동안 본인의 재능을 찾고, 그것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을 선한 방향으로 해나가라고 배웠다. 사회에 나와서도 나와 비슷하게 배워온 동료들과 본인이 맡은 일에서 각자의 보람과 성장을 공유하며, 자기다운 일을 찾아가는 여정을 바지런히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엄마'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상황을 마주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왜 어렸을 때는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했냐고 누구한테라도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엔 남들이 뭐라 하든지 난 일도 육아도 다 잘 할 거라고 큰소리 뻥뻥 쳤다. 돌아갈 회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혼자서 하면 되는 일이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친 큰 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임신을 하고 마음대로 안 되는 몸뚱이로 시간을 지워가기만 해보니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임신보다 더 힘들다는 육아를 하다 보면, 결국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해야 할 노력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시간, 에너지가 없을 것 같았다. 육아는 평생 하는 게 아니고 잠깐이니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말도 간간이 듣긴 했으나 여전히 암담했다. 나에게는 그 잠깐이 끝없는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육아에 집중한 그 잠깐 동안 경력을 쌓아야 할 시기를 놓치고, 기회가 와도 준비가 미흡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슬픔을 계속 상상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는 익숙하게 들어온 문제였다.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막상 내 일이 되어 떠안아보니 그 무게가 날 통째로 흔들 만큼 무거워 휘청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자가 아이를 낳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재정적으로 감당이 되어 시터를 고용하거나(이마저도 좋은 시터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친정이나 시댁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나는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고, 의지할 곳 없이 독박 육아 예약인데 그 와중에 하고 싶은 일까지 해야겠으니 곤란했다. 육아와 일을 둘 다 해내고 있는 엄마들이 부러웠고, 감사와 기쁨으로 육아에 전념하는 엄마들을 보면서도 부러웠다.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욕심만 부리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까지 들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20년 이상을 노력했는데, 그 일로 죄책감을 느끼게 될 줄이야.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며 열렬히 살았을까 허망했고, 그동안 쌓은 모든 노력을 통째로 버려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슬펐다. 결국 아직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실패가 확정된 사람처럼 굴었다.
예성이한테 뭐라 할 건 아닌데 종종 마음이 무너져 끝없는 한탄을 예성이를 향해 쏟아내곤 했다.
"네가 너무 부러워.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잖아.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만 할 수도 없잖아. 넌 나랑 결혼하지 않았어도, 애가 태어나지 않았어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사람이니까. 넌 하고 싶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뭘 선택할지 고민 안 해도 되잖아. 매일 그렇게 성장하고 성취할 수 있어서 좋겠다. 난 이렇게 멈춰만 있어. 나도 너와 같은 교실에서 같이 공부했는데, 왜 넌 할 수 있고 난 내려놔야 하는 걸까. 누군가는 날 보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편하게 산다고 말하려나? 그런 말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 난 이렇게 일하고 싶은데." 이런 류의 이야기를 눈물 뚝뚝 흘리며 하곤 했다. 그것도 아주 자주. 내 임신 기간은 나뿐 아니라 내 온갖 고통을 위로하고 받아내야 했던 예성이도 많은 고생을 한 기간이다.
21살, 23살에 만나 28살, 30살이 될 때까지 내 가장 최측근으로 살아온 예성이는 그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실히 달려왔는지를 실시간으로 보고 들어온 증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 신파적인 한탄을 잠자코 들으며 뾰족한 수가 없는 현실을 같이 아파했다. 그리고 종종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예성이가 미안할 일은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그때는 누구라도 나에게 '미안하다'라고 얘기해 주는 게 위로가 됐다. 그러면서 예성이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장담을 했다. 본인이 퇴근 후 4시간은 내가 작업할 수 있게 육아를 전담 마크하겠다, 주말에는 본인이 다 할 테니 그때 작업을 해라, 배 째라 하고 회사에 육아휴직을 낼까 등등 여러 아이디어를 던졌는데, 그중 얼마나 실현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를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에게 맥아리 없이 말했다.
"엄마, 난 모성이 없나 봐. 내가 너무 힘들다 보니 아이를 생각하면 무덤덤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아서 원망스럽기도 해. 임신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결이가 세상에 나오는 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아. 오히려 결이가 나오면 일어날 일들이 무겁고 무서워. 아직은 사랑하지 않나 봐. 이런 마음으로 엄마 돼도 되나 몰라."
임신을 이유로 힘든 마음을 토로할 때면 '그래도 감사하라.'라고 얘기하던 엄마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그런 류의 답변을 예상했다. 그런데 엄마는 예상과 다른 말을 했다.
"맞아, 맞아. 나도 그랬어(폭풍 끄덕임)."
"응?"
"난 너 낳고 산후우울증도 심하게 왔잖아."
엄마의 말을 듣고 놀랐다. 엄마의 인생에 나로 인한 우울함이 분명히 자리했었다는데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평생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던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에서도 놀랐다. 나 같은 울적한 마음으로 엄마가 돼도 괜찮을 수 있겠구나 싶어 죄책감이 옅어졌다.
"다정아, 아이를 낳고 기르는 중에도 네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어. 물론 그 속도와 방법은 네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 수 있지. 네가 글을 쓰고 그림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으면, 그 일을 하루에 10분씩이라도 꾸준히 해나가보자. 물론 이마저도 쉽지 않겠지만,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끈을 가늘게라도 꾸준히 붙들고 있다보면, 기회가 오더라. 포기하지 마."
엄마의 말이 나의 삶에서는 얼마나 현실적일지 살아봐야 알 것 같다. 그래도 엄마가 본인이 말한 것처럼 살아온 사람이란 건 내가 증인이다. 그래서 '할 수 있다'라는 엄마의 말이 내 귀를 지나 마음까지 들렸다. '할 수 있다'라는 그 흔한 말을 간절히 듣고 싶은 중이기도 했고.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였다.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당연한 걸 가지고 씨름했나 싶기도 하다. 몰랐던 것도 아니고, 약 30년의 인생 동안 마음대로 된 것도 딱히 없지만 임신을 하고 나서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본격적으로 커지자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임신 10개월은 내 인생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쓴 약 먹듯 삼키게 했다. 그런데 어쨌든 삼키고 나니 터질 듯이 잔뜩 쥐고 있던 힘을 풀린다. 어쩌면 임신과는 별개로 나란 사람에게는 내 인생이 이러나저러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잔뜩 쥐고 있던 힘을 푸는 단계가 필요했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한결 가벼운 태도로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여전하고도 꾸준하게 해보겠다. 어쩌면 이 역시 치열한 삶의 전쟁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꼭 이때까지는 반드시 이뤄야 해' 하고 채찍질하던 성취에 대한 조급함을 내려놓겠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양과 속도는 임신 전보다는 확연히 줄어들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진심은 임신 전보다 깊다. 내가 원하는 속도와 방식으로 되지 않겠지만, 그렇게 내 맘과 다르게 걸어간 길 끝에 무엇이 나올지 궁금하다.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할지라도 내 힘을 뺀 그 자리에 하나님이 인도하심이 채워질 것이니 조금씩 안심을 해보련다. 사실 나 대신 하나님이 하시는 게 훨씬 나을 일이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정리하다 보니 드는 생각이 있다.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무미건조한 회색빛으로 여겼던 시간들이 열등감으로 남았나 보다. 그래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순간을 스스로가 반짝이는 순간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남다르고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선택을 수집하며 오히려 안도했다. 일반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대안학교를 진학하고,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연극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남들에게 무슨 일하는지 설명하려면 한참을 설명해야 하는 특이한 일을 하고, 남들에 비해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장기 여행을 탕진을 각오하면서까지 떠나버리고. 소수의 집단에 속한 날 보며 내가 남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그러니까 난 특별한 존재라고 위안을 삼았던 게 아닐까. 그런데 임신은 날 남다른 소수의 집단에서 다수의 집단으로 옮겨 놓는 것 같았다. '아기를 키우는 30대 주부'는 다수의 집단이고, 난 이 다수의 집단 안에서 반짝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아차' 싶다. 모든 사람은 존재 자체로 특별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 자신에겐 적용하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견주어서 스스로의 특별함을 입증하려고 하고 있었나 보다. 임신이 그렇게 남다른 삶을 살아온 내 노력을 무너뜨리는 거 같아 힘들었는데, 사실 그건 무너지면 결국 내게 더 좋을 일이었다.
내 삶은 더 이상 남다른 선택을 하는 것으로 특별해 지지 않는다. 이제는 '남다른'이라는 족쇄를 벗고, 아이를 키우는 30대의 한 여성으로서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소중히 살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어떨지에 대한 의식에서 자유한 채 주어진 길을 걸어가고 싶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길은 각각 특별하다는 걸 실감하며.
드라마에서 나오는 임산부, 그러니까 햇볕 내리는 테이블에 앉아 뱃속의 아기의 발길질에 깜짝 놀라 웃고, 그 배를 따뜻하게 쓰다듬으며 아가를 위한 편지를 쓰는 행복한 임산부는 내게 너무 먼 일이었다. 주로 커튼을 다 내린 깜깜한 안방에서 좀비처럼 누워있다가 눈물을 질질 흘리는 신세였으니. 하지만 이 먹구름이 완벽히 걷히는 순간이 가끔 있었다. 그건 뱃속의 결이를 내 눈으로 직접 볼 때이다. 그 시작은 첫 심장소리였다.
점점 사람의 형상이 되어가는 결이를 보며, 내 몸 안에서 진짜 사람이 만들어지는 게 신기했다. 단순히 나의 아들이 태어난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주와도 같은 한 사람의 인생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결이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나면서 그의 인생이 시작되고, 나와 예성이는 그의 인생에서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다. 우리 외에도 수많은 중요한 사람들과 경험들과 생각들이 이 사람의 인생을 채워갈 것이다. 그렇게 내 몸에서 나온 사람이 살아갈 새로운 인생에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과 예성이의 인생이 만난 셋의 인생에는 어떤 장면들이 펼쳐질지도 궁금해졌다. 나 비록 모성 없는 임산부였지만, 조금씩 더 궁금해한다는 건 조금씩 더 사랑해지고 있다는 뜻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련다.
이 기록을 완료한 지금은 자그마치 5월 5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던 2월 18일 오후, 예약된 진료를 받으러 산부인과에 갔는데 양수가 새고 있다는 걸 발견했고, 바로 입원을 했다. 자연 진통, 유도 분만을 걸쳐 제왕절개 문턱을 넘을 뻔하다가, 2월 19일 20시 32분, 26시간의 진통 끝에 내 몸속 안에 있던 결이의 인생이 본격 시작되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임신도 간신히 끝이 났다.
결이는 '정이든'이라는 새 이름으로 살며, 인생 77일차가 되었다. 나는 엄마가 된 지 77일차가 되었다. 역시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매일 다사다난한 중에 어쨌든 무사하다. 이든이도, 예성이도, 나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내 인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