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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 Dec 09. 2021

어느 인기 없는 여행지에서의 낭만

이탈리아 남부 여행: 비코 에퀜세

비코 에퀜세(Vico Equence). 태어나 처음 들어본 곳이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곳에서 팔십일의 여행 중 열네 밤을 잤다. 원했던 건 아니었다.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에서 2주 동안 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그곳의 숙소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비쌌다. 해 볼 만한 수준의 가격이 아니다 보니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여행하려는 관광지에서 좀(많이) 떨어진 비코 에퀜세라는 동네에 숙소를 잡았다. 산 위의 초록 마당을 품고 있는 노란색 집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머물 수 있었다.     

   


이 동네의 의미는 잠을 자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남들 다 좋다는 아말피 해안을 어떻게든 많이 다녀야 본전을 뽑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듣도 보도 못한 비코에퀜세가 차츰 다르게 보였다. 아말피만큼 강렬하지 않고, 인기도 별로 없어도, 이곳의 매력이 분명히 있었다. 산속에 포근히 감싸진 데서 오는 은은한 안정감과 분주한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잔잔함이 좋았다. 어쩌면 평생 올 일이 없었을 동네에 어쩌다 와 있다는 사실이 주는 운명 같은 끌림도 있었다. 강렬한 것에 시선이 먼저 가더라도, 결국에는 비교적 잔잔하고 은은한 것에 마음이 자꾸 끌리는 편이기도 하다. 내가 그렇게 강렬하지 못한 사람이라 그럴 거다.     


하루는 우리가 머무는 이 동네를 여행해보기로 했다. 여행 블로그에도 잘 나오지 않는 이곳에서 우리만의 여행기를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숙소에서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대문 밖으로 나왔다. 가방 없이 카메라만 목에 걸었다. 그냥 잠만 자는 숙소였던 곳을 ‘여행’이라는 렌즈를 끼고 다시 보니 많은 게 달라 보였다.      



이미 숙소가 높은 산 중에 있어서 20분 정도만 더 올라가면 이름 모를 거대한 산의 정상이었다. 정상 위에서 산과 바다에 감싸인 채 이 거대한 대자연 속에 우리만 있는 것 같은 황홀한 고요함에 사로잡혔다. 정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말피 해안 도시 중 하나인 포지타노의 윗 모습이 보였다. 분명 저 밑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 화려한 동네를 먼 위에서 바라보니, 사람들이 좋다는 건 다 해보고 싶고, 그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은 압박에서 풀려나듯 가벼워졌다.

   


들꽃이 잔뜩 피어 있어서 그중 몇 송이를 조심히 꺾었다. 꽃을 꺾는 건 자연에게 하면 안 되는 일 같았지만, 산과 하늘에게 용서를 구하며 조심히 몇 송이를 꺾었다. 꽃 도둑이 된 것 같아 조마조마하기도 했고, 철은 없지만 낭만은 있는 빨강머리 앤이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날 나에게 꽃을 선물해준 산에게 여전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아무리 가까이 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그대로 두고, 다시 보고 싶을 때 꽃이 있는 자리로 찾아가는 수준의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에 두고 싶은 욕심이 참 사라지지 않는다.      


꽃줄기를 다듬을 가위가 필요해서 산동네에 딱 하나 있는 슈퍼를 향해 걸어갔다. 슈퍼에서 가위를 찾으니 창고에서 먼지 쌓인 이탈리아 산 가위를 찾아 주셨다. 숙소에 가져와 꽃을 가위로 정리하고 음료수병에 꽃을 꽂았다. 우리가 떠난 빈자리에 이 꽃병이 있는 걸 집주인이 본다면 조금은 더 행복해하지 않을까 상상하며 꽃이 시들지 않도록 꾸준히 물을 갈아줬다. 숙소를 떠나는 날 감사한 마음을 담은 편지 옆에 꽃을 두고 나왔다. 그러는 내내 먼저 행복해져 버렸다.    

       


이날은 80일의 여행 중 가장 낭만적인 날로 기억한다. 그 유명한 관광지에서의 낭만들을 이날의 낭만이 이겼다. 낭만에 초처먹는 소리라고 비웃음을 아무리 받아도, 낭만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어느 날 친구가 ‘네가 생각하는 낭만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굳이 하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굳이 하는 것들에서 낭만을 느낀다. 그렇게 굳이 하기로 한 동네 여행, 굳이 올라간 산, 들꽃을 다듬기 위해 슈퍼에서 굳이 산 가위. 음료수병에 굳이 꽂아둔 꽃. 집주인에게 굳이 남긴 편지. 이런 굳이 하는 노력이 내 하루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어느 인기 없는 유행지에서 보낸 낭만적인 날은 오늘도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도 굳이 사랑할 순간들에 힘이 되어 준다.         


[KEPCO-ENC Family 11·12월 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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