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건 바닥
하필 마지막 순서를 맡아서 이 마지막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 고민하는데, 좀 곤란했다. 이곳에는 거기까지 가서 그렇게 까지 하고 있는, 가지가지하는 이야기를 적어야 마땅하나 난 요즘 별로 하는 게 없기에. 가지가지 열매 비수기랄까.
근데 사실 다시 생각해 보면, 몸은 한 게 별로 없지만 마음과 머리는 여러 감정과 생각이 끝없이 가지를 뻗으며 날 장악했다. 그동안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움직였던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쉴 새 없이 생각하기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니까 이곳에 그렇게까지 행동한 것은 없어도 그렇게까지 생각해 버린 제 내면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유산이라는 이별을 했다. 나의 둘째 아기 별이가 내게 온 지 7주 만에 떠나간 이별이었다. 우리에게 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3주 동안 느꼈던 반가움과의 이별이기도 했다. 아기의 애착 인형을 미리 고르며 가졌던 설렘과의 이별이었다. 우리의 임신 사실을 알고 함께 기뻐해 준 이들의 기쁨과도 이별이었다. 임신을 알고 있던 3주 동안 뱃속 아기를 중심으로 조정했던 내 일상과도 이별이라 백지 위에서 다시 삶을 세워야 했다. 남편과 첫째 아이와 함께 상상했던 넷으로서의 미래와도 이별이었다. 함께할 미래를 떠올리며 스민 미소와도 이별이었다. 여느 이별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이별 후유증을 겪었다. 분명히 내게 왔다가 흔적 없이 떠난 아이가 만든 공허한 빈자리에는 한 가지 문장이 동동 떠올랐다.
“안 될 일은 안 된다.”
임신을 알았을 때부터 왠지 유산을 걱정했다.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급작스러운 임신에 내가 겪고 있는 게 뭔지를 몰라 뭘 걱정해야 할지도 몰랐었다. 하지만 둘째다 보니 뱃속의 아이가 무사히 나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수많은 검사 절차와 난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 주 두려웠다.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비극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냥 일어나 버리는 걸 종종 목격했다. 지뢰를 밟듯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터질 줄 모르겠는 비극. 언제든 내게도 올 수 있는 비극.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내가 살았던 이태원에서 10.29 참사가 일어났기도 했기에 한층 더 비극이 가깝게 느껴졌다. 내게도 당장 비극이 온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유산이었고,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무서워하며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무리가 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작업도 다 쉬고, 점점 더 괴로워지는 입덧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견뎠다. 제발 내게 찾아온 이 아이가 건강히 태어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으러 간 산부인과 초음파실이 심장 소리 대신 의사 선생님의 침묵으로 가득 찼을 때, 알았다. 비극이 결국 날 덮쳐구나. 그 어떤 굉음보다도 고통스러웠던 침묵이었다.
일어날 비극은 일어나고 안 될 일은 결국 안 되나보다. 무너진 내 심장 위로 그 허망한 문장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고, 내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여쎄다. 안 될 일은 안된다는 명제는 유산의 경험을 넘어서서 내 삶 전체에 독을 퍼뜨렸다. 그 결과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고, 일상을 돌보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꾸역꾸역 나아가고 있던 그림책 작업을 멈췄다. 그동안은 그래도 아직 안 해봤으니 모르는 거다, 자신 없어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어쩌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 회로를 돌리면서 간신히 한 걸음씩을 뗐었다. 하지만 안 될 일은 안 된다면, 내 그림책도 혹시나 결국 안 될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애써서 해야 할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물론 안 될 일인지 될 일인지는 여전히 모르는 거라지만, 더 이상 희망 회로를 작동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단 잠시 멈추기로 했다. 나아갈 힘이 다 떨어졌으니 다시 차오를 때까지 12월은 제대로 쉬는 달로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렇게 멈춘 뒤 느낀 감정은 회복이 아니라 패배감이었다. 첫 그림책을 올해 안에 완성하겠다고 한 결심을 올해도 결국 지키지 못했다는 실패감. 또 말만 하고 아무것도 해낸 게 없다는 자기 비난.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나? 그렇지 않다.
올해 1월 1일에 거까그까가 출판됐고, 각종 북토크와 서점 입고를 했다. 1년 동안 매월 거까그까의 독자들에게 띄우는 가지레터를 써나갔다. 작년 5월부터 올해 3월까지는 에디터 일을 하다가 그림책 작업에 집중하고 싶어 마무리 짓고, 그림책 작업을 달려 6월에 그림책 더미북을 완성했다. 공모전도 내고 출판사들을 만나며 그림책 수정작업을 지속했다. 내 그림책에 관심을 갖는 출판사 세 곳을 만났고, 그중 두 곳과 추가 미팅을 하며 그림책 수정 방향을 논의했다. 이제 수정 방향 중 마음에 와닿는 것들을 고려해 또다시 수정작업을 하고 나면 출판에 한 발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는 중에 구미 그림책 책방에서 글쓰기 모임을 8개월 동안 진행했고, 친구와 함께 쓰고 있는 그림책 에세이 원고도 한 달에 한 편씩 꾸준히 써냈다. 외주를 받아 쓰고 있는 원고도 1년 동안 격월로 계속 썼다. 유튜브도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아이와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아이 낳고 처음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친구들과 여행도 다녀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많은 것을 했다.
그런데 그걸 머리로는 앎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과정에서 애쓴 건 알겠으나, 그렇다고 좋은 결과물을 낸 건 없지 않냐는 게 내 안의 엄격한 검열관이 소리치는 말이었다. 한 건 많을지라도 해낸 건 없다는 차가운 판결을 내렸다.
그러다 진짜 바닥을 본 날이 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는데, 남편은 아직 내가 몸도 더 회복되어야 하고 천천히 하라는 맥락 속에서 “너는 아직 의지(남편 말로는 ‘기력’을 말하고 싶었단다)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안 그래도 나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찼던 탓에, 남편의 말도 비난으로 들어버렸다. 내가 아무리 날 비난해도 남편만은 내게 잘하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었다(설령 내가 믿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이 내게 의지가 없다고 이야기했으니 나의 형편없음을 확인 사살을 당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무너져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한참을 끅끅 거리며 울었다. 남편도 지금까지 나를 알고 지내면서 그렇게까지 심하게 우는 건 처음 봤다고, 많이 놀라 하며 결국 같이 울었다. 나 역시도 내가 그렇게 울 수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울면서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가관이었다. 내가 한심하다. 내 인생이 부끄럽다. 도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등바등했지만 아직까지 아무것도 해낸 게 없다. 그동안 열심히 산다고 산 게 무슨 소용이냐. 너무 미련하다. 앞으로도 더 나아질 거라는 자신 없다. 난 계속 엉망일 거다. 기대가 하나도 없다.
그렇게 구질거리며 바닥을 쳤다. 넘치는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에서 허우적거렸다. 내 속으로는 생각했어도 입 밖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적은 없어서 내 입에서 나오는 가혹한 말들이 생경하기도 했다. 내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실감 났다. 그리고 동시에 이건 좀 과하다 싶었다. 그런 미운 말들을 다 토해내고 나니, 나의 바닥 위에서 비로소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마침 무료 상담 6회기를 받을 기회가 있어 상담 선생님을 만났는데,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에 대한 기준이 정말 높은 사람이라고. 남들이 뭐라 하던 자기 자신이 만족해야 하는데, 그 기대 수준이 너무 높아서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여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에도 길이 있어 다정씨는 계속 자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찾는 쪽으로만 생각의 길이 흐를 것이라고. 이제 본인에게 만족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니 꾸준한 삽질과 연습이 필요할 거라고. 한 번에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돌아보니 내가 진심으로 나에게 만족스러워해 본 적이, 스스로 잘했다고 이야기해 준 적이 인생 통틀어 잘 없다. 제법 만족할만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내게 했던 가장 최고의 칭찬은 다행이다 정도였고, 바로 다음 해야 할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달리다 보니 지쳤고, 무너져 바닥에 닿았다. 이제는 이 반복을 끊고 싶었다.
상담 선생님께서 숙제를 하나 내주셨다. 70%의 삶을 살아보라고. 계획도 70% 정도만 세우고, 그 70%의 계획 중 70% 정도만 해내도 잘했다고 얘기하는 연습을 하라고 말이다. 120%의 계획을 세우고 그중 간신히 반 정도 해낸 뒤에 오늘도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무수한 날들이 떠올랐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보고 싶은 숙제였다.
70%로 사는 숙제를 연습하면서 떠오른 기억의 조각이 있었다. 유진님, 하늬님과 같이 회사에 다니던 시절, 우리가 함께 만든 프로그램에는 “나는 충분해”라는 캠페인이 있었다. 프로그램 끝에 참가자들이 “나는 000하기 충분해!”라는 문장의 빈칸을 채우도록 해서, 스스로를 충분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캠페인이었다. 그런데 그 캠페인을 진행할 때마다 성에 안 차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충분하다’는 표현이 내게는 모자란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용량이 100인 병이 있다면 나는 적어도 120은 채워서 흘러넘쳐야 하는 사람이었다. 충분하다는 말은 꼭 70 정도만 채워진 병을 보는 거 같았다. 충분하다는 말은 당시의 내게 완벽한 칭찬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충분해”라는 단어를 진심의 칭찬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특히 나 자신에게 말이다. 100인 내가 늘 120 정도는 하려고 하다 보니 자주 지친다. 70이 차 있는 잔을 보고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눈이 충분하다고 여기며 만족할 수 있는 쪽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만족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질 테니. 그 충분함이 양분이 되어 내가 바닥을 딛고 일어서서 나아가는 걸음이 더 건강하고 꾸준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최근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드라마를 봤다. 거기에도 이주 여성이 나온다. ‘여름’이라는 여주인공이 세상과 사람에 지쳐 퇴사를 한 뒤 ‘안곡’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로 무작정 와 적응을 해나가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사람들과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그러는 중에 자신에게 맞는 방식의 삶을 일구어가기 시작한다. 마지막 화에서 여름은 이런 말을 한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말했다.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았다. 제법 쌀쌀해진 새벽을 가르며 아직 해가 뜨기 전 거리를 마음껏 달렸다. 뿌듯했다. 충분하다. 집에 돌아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 세상에서 물이 제일 맛있다던 할머니 말이 생각났다. 정말 그랬다. 충분하다. 빨래를 널 때 나는 탁탁 소리가 좋다. 그리고 손에 남은 비누향이 좋다. 충분하다. 마약을 탄 것 같은 도서관 오후 햇살에 살짝 졸았다. 맛있는 낮잠이었다. 충분하다. 책장 앞에서 서서 뭘 읽을지 고민하는 일은 늘 즐겁다. 설렌다. 충분하다. 정말 충분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지금 충분하다. 살아보자."
한동안 이 대사를 머금고 있다가, 나도 연습해 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 등원 준비를 하는데 아이랑 실랑이하지 하지 않고 기분 좋게 옷을 갈아입힐 수 있었다. 충분하다. 아침마다 시리얼을 찾는 아이가 오늘은 요거트에 포도를 넣어줬더니 맛있게 먹었다. 충분하다. 출근하려고 집을 정신없이 나서는 남편을 불러 세워 오랜만에 뽀뽀로 배웅해 줬다. 충분하다. 오전시간에 핸드폰 대신 차 한잔을 마시며 오랜만에 모닝페이지를 썼더니 하루의 첫 단추를 잘 낀 기분이다. 충분하다. 오늘 마감인 가지레터를 벼락치기하느라 고생했지만, 어찌 됐든 무사히 발송할 수 있을 거 같다. 충분하다. 오늘은 이웃 친구들과 연말 모임을 하기로 한 날이다. 가까이에 마음 나눌 친구들이 있다니 충분하다.
바닥을 쳤지만, 다시 새로운 길로 걸어보려는 나. 충분하다.
내가 내게 충분하다는 이야기 해주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어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줬다. “충분하다”는 단어를 부족하게 여기며 살아온 지난 시간이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만든 동력이 된 것도 맞으니 인정하자고. 그랬던 나의 수고에 고마워하라고. 충분하다는 말이 성에 안 찼던 과거도 사실 충분하다고. 그 말을 곱씹으며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주신 이에게 말하고 싶다.
한 해 동안 충분히 충분했어요. 정말로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