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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Oct 18. 2020

우정, 결혼, 아우라  

 짐멜의 글 중에 "분별의 심리학"이라는 글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분별은 상대방의 인격 혹은 비밀과 관련된 사항에 가깝게 다가가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보통 사회생활에서 맺은 관계에서는 서로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한도를 넘어서서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사무적인 관계에서 상대에게 캐묻거나 캐묻지 말아야 하는 영역은 문화에 따라 다소 다르다. 서양문화에서는 나이도 그중 하나이다. 유학 시절 초기에 멋모르고 상대의 나이를 묻곤 했다. 이상한 걸 묻는다는 반응이었고 대답을 들은 기억도 없다. 분별을 지키기 어려운 대표적인 관계로 짐멜은 우정과 결혼을 든다. 우정과 결혼은 서로에 대한 친밀함에 토대를 둔 관계이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는 서로를 그냥 아는 관계를 넘어선다. 짐멜은 정신적으로 친밀한 관계는 결혼보다 우정에서 더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현대에 들어 우정 역시 변모한다. 전면적으로 친밀함을 맺는 우정이 점점 불가능해진 대신에 우정의 분화가 일어난다. "어떤 사람과는 감정의 측면에서, 또 다른 사람과는 정신적인 공통성의 측면에서, 제3의 인물과는 신앙의 측면에서... "등등 다양한 우정들을 쌓을 수 있다. 한 측면과 결합된 우정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분별이란 다른 측면에 속하는 영역은 건드리지 않는 태도이다. 현대인의 우정에서 친밀한 관계란 상대의 모든 인격적인 측면과 접촉하는 관계가 아니라 한 영역과만 집중적으로 관계를 맺고 다른 영역은 서로 존중하는 그런 관계이다. 친밀한 관계란 무조건 자신의 존재 전체를 다 내어주는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정의 분화에 대한 생각은  모더니티의 사상가다운 생각이다.     

  한편에서 우정의 분화, 현대화를 말한 짐멜이 현대인의 결혼에 대해서는 다소 곤란해한다. 과거 전통사회의 결혼에 비해 현대인의 결혼에서는 분별을 지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 결혼은 남녀 간 사랑보다 양쪽 집안의 경제적, 사회적인 목적에 따른  결혼이어서 애초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인격적인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에서의 결합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에 반해 현대인의 결혼은 모든 삶의 내용들을 부부가 공유한다는 이상에서 출발한다. 현대인의 결혼은 에로틱한 결합에 인격적인 결합을 더한 관계를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든 면을 완전히 내보이고 싶다는 유혹에 처음부터 빠진다. 짐멜의 이러한 관점이 백 년 뒤의 오늘날에도 다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사랑과 인격적 결합에 기초한 결혼이라는 관념이 현대의 결혼을 전통적 결혼과 구분하는 주요 기준임은 사실이다. 모든 관계 중에서 결혼이야말로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분별을 지키기가 가장 어려운 관계가 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분별을 지키지 못한 결과 부부 관계는 한꺼번에 "자신의 밑천을 다 써버리는"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짐멜은 경고한다. 황금알을 낳는 닭을 도살해버리면 당장 황금알을 한꺼번에 얻지만 미래에 지속적으로 이어질 자산을 탕진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생산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내면의 사유 재산을 존중하고, 물을 권리를 비밀을 지킬 상대의 권리에게 양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상대방의 보이지 않는 부분, 불분명하면서 어렴풋한 형태로만 감지되는 부분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상대방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매력을 찾아주는 것, 즉 상대방에 대한 지식보다 믿음과 이상화를 추구하는 그런 관계, 짐멜이 추구한 이러한 인간관계는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으로 들리긴 한다.  


"서로에 대한 분별이 부족할 때 많은 결혼은 확실히 파탄에 이른다. 결혼은 아무런 자극이 없는 진부한 습관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여지가 더 이상 없는 자명한 일상으로 전락한다. 이에 반해 생산적인 깊이를 지닌 관계는 마지막으로 드러난 상대의 모습 뒤에서 언제나 가장 최후에 드러날 모습을 예감하고 존중하며,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도 매일 새롭게 정복하도록 자극한다."


  인간관계에 대한 짐멜의 성찰은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떠오르게 해 준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이 정의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아우라는 상대를 다 잘 안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라 내가 상대에 사로잡힐 때 그의 현 모습 안에 내가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어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숨어 있다고 짐작할 때 느끼는 무엇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에 대해 가까움과 멂의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누구나 서로에게 알려진 부분과 베일에 싸인 부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구조를 지닌 인간관계 모두가 아우라를 불러일으키는 관계는 아니다. 짐멜이 말한 분별 속의 친밀함,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는 시선 교환으로 비유되는 '영혼의 주고받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눈에서 눈으로 전달되는 시선은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가장 생생한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눈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때에 주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 눈은 우리의 영혼을 보고자 하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영혼을 보여준다." 시선의 교환이란 영혼의 주고받음이 일어나는 매체이면서 그 안에서 서로에게 전달되는 내용은 언제나 초과분을 예감하게 한다. 따라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시선의 독특한 경험으로도 정의한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 대상이 우리의 시선에 응답해주리라는 기대가 충족되는 곳에서 우리의 시선에는 아우라의 경험이 풍요롭게 주어진다.”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이러한 아우라는 짐멜이 결혼 관계에 대해 분별과 함께 요구한 이상화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짐멜의 분별과 이상화, 벤야민의 아우라에 대해 교훈으로 삼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길까? 아니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오로지 나 자신만이 아닌 우리 시대에 이상적인 인간관계의 이 기준은 폐기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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