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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Dec 05. 2020

눈과 귀의 사회학에서...

 "듣지 않고 보기만 하는 사람은 보지 않고 듣기만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불안해한다." 짐멜의 「감각의 사회학」에 나오는 구절이다. 대중교통의 승객들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상황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짐멜이 이 글을 쓰던 20세기 초에는 문화적으로 새로운 현상이었다.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거나 상대방의 말을 듣지 못한 채 몇 분 아니 몇 시간 보기만 하면 왜 혼란스럽고 불안해지는 것일까? 얼굴에서 그가 누구인지를 헤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처음 본 순간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도 한다.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 대통령의 말처럼, 얼굴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래서 어떤 정신 상태, 어떤 성품을 지니는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살아온 과거는 얼굴에 지속적인 특징들을 남긴다." 그러나 얼굴은 이처럼 지속적인 특징들 외에 순간의 변화무쌍한 내적 상태들도 반영한다. 얼굴의 이러한 이중 역할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읽는 것이 그 사람의 지속적인 특징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상태인지,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인지 아니면 객관적인 인식인지가 종종 모호해진다.  반면, 귀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눈에 비해 심플한 편이다. 귀를 통해 전달되는 것은 상대방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에 한정된다. 즉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우리는 그가 이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를 알게 된다.  눈과 귀가 노동분업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귀는 우리에게 단지 시간 속에서의 인간을 알게 해주는 반면에, 눈은 그러한 시간 속 모습과 동시에  본성의 지속적인 것을 보여준다."


눈으로 보기를 통해 인간관계가 형성되려면 서로 시선을 교환해야 한다. 시선을 교환할 때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는 쌍방향의 주고받음이 성립한다."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리에게 받아들이는 시선 속에 우리 자신을 동시에 드러낸다. 우리는 눈으로 바라볼 때에 주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시선의 교환이야말로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가장 완벽하게 상호성이 실현되는 통로가 된다. "눈에서 눈으로 전달되는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사이의 모든 상호작용, 그들의 상호 이해와 상호 기피, 그들의 친밀함과 냉담함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시선 교환이 성립하지 않으면, 즉 두 시선이 서로 어긋나거나 잠시 멈추게 되면 이는  서로를 기피하거나 서로에게 냉담함을 알리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반면 귀에는 상호성이 없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귀로 듣는 행위 자체는 일방적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말을 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귀는 주지는 않고 단지 받기만 하는 전적으로 이기적인 기관"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눈에 비해 귀는 초개인주의적이다. 시선의 교환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 가능한 반면,  말하고 듣는 것은 개인과 개인끼리뿐 아니라 개인과 다수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한 사람이 말하면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고 동일한 청각적 인상을 가질 수 있다.  박물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본 것에 대해 동일한 시각적 인상을 갖기 힘든 반면, 콘서트에서 같이 들은 것에 대해 동일한 청각적 인상을 가질 수 있다.  박물관 관중과 콘서트 청중을 비교해볼 때 후자가 전자에 비해 더 친밀한 통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듣기의 이러한 사회학적 의미에서 보면 라디오 매체를 이용한 파시즘의 선동정치가 어떠한 메커니즘에서 가능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보기와 듣기가  지닌 사회학적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짐멜보다 30여 년 후에 벤야민은  "인간의 지각 기관에 부과된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서는 전혀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라고 주장했다. '관조'가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한번 흘깃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그것이 지닌 중요성도 점점 더 약화되고 있다면 눈의 사회학적 의미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람들끼리 한 공간에 오래 같이 있다고 해서 전혀 어색해 하지 않고, 굳이 서로를 의식하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 시선 교환은 여전히 중요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친밀성을 시선의 교환으로 확인하고, 귀로 듣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으로 교정할 필요가 상존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제대로 보려면 어떤 개념이나 말로 쉽게 재단되지 않는 것을 포착해내는 주의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러한 주의력을 늘 발휘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매일매일의 "진부한 대화들,  우리의 망막에 남은 잔상들"에는 듣고 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남는다.  들으면서 말의 내용을 놓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쉽게 놓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은근한 어조 또는 그 어조 아래 숨겨진 내면이다.  이것을 놓치는 이유는, 그 순간에 보거나 들었지만 습관적인 프레임을 통해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과 그 프레임을 빠져나가면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지각 내용이 이중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성이 부족하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사람일수록 보기보다는 듣기가 더 발달하는 것은 아닐까? 내면으로 침잠하게 되면서 상호성을 요구하는 보기를 거부하기는 쉬워도, 귀에 들려오는 것까지 차단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귀로 듣는 능력이 더욱 발달한다. 벤야민의 다음 말은 자신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어떤 괴로운 생각, 어떤 고통의 콕콕 찌르는 아픔에 몰두한 사람이 아주 미세한 소음이나 중얼거림 소리에 방해받고, 어떤 곤충의 날갯짓에 동요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영혼이란 몰두하면 할수록 그만큼 쉽게 산란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사유 이미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자신에게 몰두할수록 오히려 바깥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에 민감한 귀가 생긴다. 그래서인지 베를린 유년시절에 대한 벤야민의 회상에는 소리에 대한 언급이 유독 많다.  뒤 편 복도에서 요란스럽게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  로지아(건물 위층에 발코니와 비슷한 공간)에서 내려다볼 때 들려오던 서민들 일상의 소리,  가사의 시작을 알리는 열쇠 꾸러미의 달그락 소리, 끔찍이도 가기를 싫어했던 수영장에서 들리는 수도관의 콸콸 소리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등이 회상의 공간에서 들려온다. 그러한 회상의 공간에서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병치레가 잦았던 벤야민의 침상에 앉아  졸졸 흐르는 냇물처럼 입가 가득 넘치게 이야기를 들려주신 어머니의 목소리,  종종 집안에 울려 퍼지던 어머니의 노래 소에 대한 회상은 이야기의 내용, 노래의 가사보다는 목소리 자체에 대한 기억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렇게도 강하게 기억에 각인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닌 치유의 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힘 때문이다. 이는 벤야민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목소리를 강조해온 문화적 전통에서 설명된다. 글이 장황해지긴 하지만, 키틀러의 이론을  짧게 소개하면서 글을 끝내기로 한다. 1800년경 독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 문학은 그 어느 시대보다 영혼 추구, 자기 관찰, 내면성을 중시하면서 범신론적인 자연, 이상적인 어머니, 이상적인 여성이라는 초월적인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문학이다. 키틀러는 그러한 관념론적  문학의 기원을 당시 읽기와 쓰기 교육에 일어난 혁신에서 찾는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작가들은 어머니의 입을 통해 읽기와 쓰기 교육을 받은 세대에 속한다. 처음 글자를 배우던 때부터 아이들은 그 이전 시대처럼 의미 없는 철자들을 기계적으로 쓰고 읽는 식으로 학습하지 않고 의미를 지닌 최소 음절을 어머니의 입으로 들으면서 글자를 배운다.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으며 배운 글자는 낯선 기호가 아니라 의미로 충만한 세계를 상상하게 해주는 채널이 된다.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의미 없는 소음이 아니라 의미로 충만한 영혼의 소리로 들린다. 이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대한 이상화이고, 여성과 어머니의 이상화는 국가적, 제도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키틀러는 기술한다. 이상적 여성, 어머니는 자연의 내적 목소리, 순수한 내면적 정신으로 이상화되면서도 정작 사회에서는 여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인정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여성은 국가공무원이 될 수 없었고,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었으며, 저자로서의 명성을 얻을 수 없었다. 벤야민이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느낀 치유의 힘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대한 이상화라는 전통을 어쩔 수 없이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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