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퇴근하고 오니 큰딸 유나가
“아빠, 나 이제 ㅇㅇ이랑 안 놀 거야.”
합니다. ㅇㅇ이는 지난 번에 파자마 파티를 했던 그 친구이고 진짜로 “매일” 같이 나가서 노는 친구입니다. 유나 동생 지민이와 ㅇㅇ이 동생 진우까지 다 같이 어울려 노는 사이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물어보니,
“ㅇㅇ이가 나한테 1학년이라고 여러 번 말했어. 내가 하지 말라고 하고 사과해 달라고 했는데 ‘내가 언제 그랬어? 한 번밖에 안 했는데?’ 하면서 무시했어.”
“키 작다고 1학년이라고 해서 너무 속상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구나. 친구가 밉고 서운하고 짜증났겠다.”
키 작은 게 콤플렉스인 유나는 훌쩍훌쭉 울었습니다.
그 사이에 제가 출장이라 어떻게 됐는지 몰랐는데, 어제 저녁에 집에 있으니까 어김없이 ㅇㅇ이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큰딸 유나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동생 지민이가 맞이했습니다.
제가
“지민아, 오늘은 너랑 ㅇㅇ언니랑 둘이서만 나가 놀아야겠네.”
하니까 아내가 다가옵니다.
“유나 저대로 놔 둬도 괜찮겠나?”
저는 친구 관계에 개입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하기를 바랐지만 아내가 걱정을 하기에 방으로 가서 유나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친구랑 같이 안 놀아도 되는데 기분을 풀어야 하니까 잠깐 나가자.”
그리고는 지민이랑 친구랑 유나를 모두 모아 앉히고 <감정 카드>를 꺼내 놓았습니다.
“오늘 왜 안 놀고 싶은지 말해 봐.”
“며칠 전에 놀이터에서 ㅇㅇ이 동생 진우가 친구들을 데려 왔는데 ㅇㅇ이가 걔들한테 나보고 1학년이라고 장난쳐서 진우 친구들이 동생인데 다 나보고 1학년이냐고 4학년 맞냐고 막 그랬어요.”
“ㅇㅇ아, 이거 맞아?”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 안 났구나. 유나야 이번에는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감정 카드에서 골라 봐.”
옆에서 지민이가
“화 나고, 속상하고, 수치스럽고...” 하면서 막 카드를 챙기니까 유나가
“수치스럽지는 않았어.” 하길래 방해될 거 같아서
“지민아 저는 다른 카드 줄 테니까 언니가 어땠을 거 같은지 저기 가서 고르고 있어라.”
하고 지민이를 보냈습니다.
“유나야 이제 네가 고른 감정을 ㅇㅇ이 한테 알려줄래?”
“나는 화나고 억울하고 속상했어. 그리고 짜증나고 슬펐어.”
“ㅇㅇ아, 이 말 듣고 어때?”
솔직히 여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ㅇㅇ이는
“지루하고 심심해요.”
했습니다. 매우 당황했지만
“지루하고 심심하구나.” 하고 나서 재빨리 머리를 굴려서 지민이를 불렀습니다.
“지민아, 너도 놀이터에 있었지? 그때 언니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려줄래?”
“화났을 거 같아요, 속상했을 거 같아요, 창피했을 거 같아요, 당황했을 거 같아요, 억울했을 거 같아요. ...”
멀리서 혼자 모은 감정 카드를 하나씩 내놓으면서 언니 감정을 헤아려 줍니다.
“유나야, 이 말 듣고 어때?”
“안심돼요.”
“ㅇㅇ아, 지금은 기분이 어때?”
“미안해요.”
이제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서로 감정을 잘 말하고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라고 칭찬 인정을 했어야 하는데 조금 후회는 되지만 어쨌든 “자, 이제 카드 정리하자.” 하고 카드를 정리했습니다.
당연히 유나는 지민이를 데리고 ㅇㅇ이와 놀러 나갔습니다. 1시간 뒤에 다같이 돌아와서 또 1시간을 더 놀다가 ㅇㅇ이 엄마가 애타게 찾는 전화가 와서 ㅇㅇ이는 아쉬워 하며 집에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