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스플리트 #3
간혹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는 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길들이 골목들로 이어져 있고 낯설고 많이 아름다울 때 말입니다. 그런 길들을 굳이 건조한 지도나 내비에 의지한 채 단 한 번의 착오도 없이 이곳에서 저곳 그곳까지 완벽하게 종종걸음을 치는 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이전에 한번 와 봤던 길 같은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좀 전에 지나왔던 곳임을 깨닫고는 겸연쩍은 미소를 살포시 지어보는 것이 그런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예의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상당히 예의가 바른 사람입니다.
한 두 군데 놓친 들 그게 뭐 대수이겠습니까. 물론 나는 나이 덕에 거기서 약간 비껴 나 있지만 낯선 곳을 찾는 대부분의 이유가 정확하고, 규칙을 강요하는 살벌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그 익숙해서 식상한 얼굴이 싫어서 일 텐데 굳이 떠나온 그곳의 규율에 집착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내려놓는 게 두렵고, 더 가지지 못하면 불안한 사람이 아니라면 낯선 곳의 길, 특히 신비로운 골목길이 부리는 매직에 취해 볼 일입니다. 더 많이 놓치고 더 자주 길을 잃고 헤메 볼 일입니다. 그러면 놓친 것들보다 더 많은 소중한 것들을 보게 될 겁니다. 단 그 길이 아름답다면 말입니다.
북문 밖, 베네딕트 수도원 첨탑과 나란히 서 있는 크로아티아 닌의 주교 그레고리(Gregory of Nin) 동상입니다. 그레고리는 로마 교황에게 일반 시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 대신 크로아티아어로 예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으로 이 동상은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이랍니다. 8.3m 높이의 역동적인 모습을 한 이 동상이 사랑받는 이유는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 때문입니다.
여행지를 다니다 보면 동서양의 구분 없이 어디든 빠짐없이 관광객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이런 기복(祈福) 수단 및 행위들입니다. 촛불을 켜는 것에서부터 불상이나 동상의 각종 신체 부위를 만진다든가 연못에 동전을 던지는 등 그 종류와 수효는 무척이나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간 여러 곳을 다니며 나와 애들 엄마 참 많이도 빌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대형견에 속하는 애완견들을 많이 데리고 다닙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작고 귀여운 강아지들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대부분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 온순하고 얌전해 보이고, 목줄의 부착 여부에 대해서도 견주나 일반 보행자들이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체구가 커서 그렇지는 않을 텐데 우리랑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레고리 주교의 검지 손가락을 왜 유난히도 길게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유모차에서 잠들어 있는 이 곳의 아기도 우리나라 애들만큼 작고 귀여울 것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종탑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이유는 비록 숨을 헐떡일지언정 전망대에 섰을 때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그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도시의 매력을 내려다보는 쾌감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종탑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걸으면서, 크지 않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한줄기 빛을 향해 더 높고 신성한 곳으로 오르는 듯한 신비한 순간을 체험하는 것은 꼭대기에 서 있을 때의 만족스러운 쾌감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1,100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제작된 이 종탑은 오랜 역사만큼 보수공사도 여러 차례 이루어졌으며 지금은 종탑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탑의 높이는 60m로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붉은색 지붕으로 채색된 건물들이 아드리아해의 푸른색 바닷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은 스플리트 여행의 백미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 로마의 유적 도시하면 관광객을 상대로 먹고사는 고만 고만한 고대 도시를 떠올리지만 스플리트는 다릅니다. 아드리아 해의 가장 큰 항구이자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로 큰 이 도시는 세련되고 젊음이 넘칩니다. 1,700년이란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은 궁전은 백색으로 빛나고, 푸른 바다에 떠 있는 호화 유람선들은 눈이 시리도록 빛납니다. -
덩치가 별로 크지 않은 크루즈선이 해가 지는 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한 모습입니다.
운 좋게도 오륙도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쉼터를 마련한 덕분에 매일 많은 배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작은 어선들로부터 항공모함까지, 그리고 사드 사태 이전에는 거의 이틀에 한 대꼴로 내 눈앞을 유유히 지나다니는 호화 유람선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 유람선을 보는 내 느낌은 집에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집에서처럼 무심해지지가 않습니다.
뭔가 모르게 남겨지는 것 같은, 누군가가 내 곁에서 떠나가고 뭔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하는, 내가 잘못했구나 앞으로는 더 잘해야겠다는, 괜찮아 곧 잊힐 거야, 이런 뜬금없는 유치한 감상들이 떠올라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감성적'이라는 무드에 잠시 젖어봅니다.
우리 동네에서도 자주 저녁노을을 보지만 솔직히 지금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처음 보는 저게 훨씬 더 멋져 보입니다.
참고문헌 : 크로아티아 홀리데이, 양인선, 꿈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