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나 밤 수유나 새벽 수유를 하는 경우에는 아침에 여지없이 묵직한 기저귀에 새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기저귀 갈기는 신생아 때는 하루 9회-10회 정도 서서히 줄어들어 돌 때쯤 되면 5회-7회 정도로 줄어든다.
하루 평균 6회인 셈인데 그것을 2년 정도 한다고 치면 한 아이당 4000회가 넘는 기저귀 갈기를 하는 셈이다.
수많은 기저귀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기저귀는 잘 골라야 한다.
밴드형, 팬티형부터 계절별, 두께별, 브랜드별로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선택 장애가 있는 엄마들에게는 고르는 게 쉽지 않다.
큰애의 경우에는 어떤 제품이 좋은지 몰라 엄청나게 다양한 기저귀를 샀었다. 좋은 기저귀란 아이 엉덩이에 발진이 잘 나지 않고 사이즈가 애매하지 않아 새지 않으며 잘 흡수된 소변이 잘 배어 나오지 않는 제품을 말한다.
유명하고 비싸다고 다 좋은 제품은 아니다. 그리고 개인마다 체형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좋은 제품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제품은 친환경적이지만 착용감이 너무 거칠고 어떤 제품은 단계별 사이즈가 너무 크거나 작아 애매하고 어떤 제품은 사이즈는 잘 맞지만 흡수체가 밤새 아이의 소변을 감당하지 못해 발진이 자주 나는 제품도 있다. 가장 예민하고 오랜 시간을 사용해야 하니 가장 공부를 많이 하고 고민을 많이 하며 골랐던 것이 젖병 다음으로 기저귀였다. 여러 시행착오로 눈에 불을 켜고 찾은 제품. 둘째는 첫째가 정착했던 제품을 그대로 사서 쓰고 있다. (이건 여담이지만 비닐봉지 한 장도 아껴 쓰는 사람으로서 늘 기저귀로 인한 환경오염이 걱정된다. 여건상 천 기저귀를 쓰기 어려워 일회용 기저귀를 쓰고는 있지만 최대한 기저귀를 알차게 채우고 나서야 갈아주는 건... 환경과 아이에 대한 마음의 절충점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이다.)
기저귀를 벗기고 아이가 소변만 보았을 경우에는 물티슈로 간략하게 닦아주고는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여러 번 두들기며 물기를 말려주고 다시 기저귀를 입힌다.
문제는 대변을 누었을 경우다.
우리 아이는 모유 수유를 하고 있어 무른 변을 자주 보는데 간혹 가다가 양이 너무 많은 날엔 넘치기도 하고 과격한 활동을 하는 날엔 여지없이 새기 때문에 예민하게 보고 있다가 배변 즉시 갈아주어야 한다. 바로 갈아주지 않으면 요로 감염에 걸릴 수도 있으니 늘 아이의 기저귀를 예민하게 살펴야 한다.
아이가 대변을 보면 나는 화장실에 달려가 물을 틀어놓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온수가 한참 뒤에 나온다.) 물을 틀어놓은 채로 기저귀를 벗기고 엉덩이에 짓눌려 있는 것들을 물티슈나 휴지로 제거한 후에 왼쪽 팔로 아이를 안고 세면대에 가서 엉덩이를 씻긴다.
흐르는 물에 아이 엉덩이를 갖다 대고 손으로 여러 번 문질러 씻는다. 너무 과하게 묻었을 경우에는 비누를 쓰기도 하는데 아이의 소중한 곳에는 비누가 닿지 않게 씻겨야 한다.(여자아이의 경우 질 내 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아들내미는 그냥 빡빡 비누로 씻겼다.) 아이의 엉덩이가 따듯하게 데워지면 물을 끄고 마른 수건으로 엉덩이를 감싸 안고 나온다. 그러면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한다. 스스로 불을 끄는 이벤트까지 하고 나오면 세상 예쁜 아이의 웃음을 볼 수 있다. 따듯한 물로 데워진 엉덩이를 찹찹 찹찹 토닥이면서 물을 흡수시키고 말리면서 작고 앙증맞은 복숭아 같은 엉덩이가 뽀송해진다.
엄마는 아이를 먹여야 하는 의무도 있지만 들어가는 것이 있다면 나오는 것이 있듯이 먹이는 것 이상으로 기저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변의 색깔과 상태를 관찰하고 그에 맞는 음식으로 처방한다. 황금 변을 보기 위해 유산균을 먹이고 부드럽고 딱딱하고 힘든 변을 보면 푸룬 주스 같은 걸 처방한다.
상태가 좋은 변을 보면 괜히 아이를 잘 먹인 것 같아 기쁘다.
하지만 까맣거나 하얗거나 초록색이거나 혹은 너무 묽거나 너무 딱딱하거나 하면 엄마의 걱정은 시작된다.
이렇게 엄마는 아이의 기저귀를 보며 울고 웃는다.
아이의 기저귀를 살피고 갈아주는 일.
이것은 마치 엄마에겐 성적표를 받는 것 같은 일이다.
인간의 똥.
더러운 똥이 분명하지만 똥을 만져도 나 스스로가 하찮다고 느껴지거나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의 더러운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나 스스로를 대단하게 느낀다. 오히려 더러움을 생각하기보다 아이의 변의 색과 냄새, 상태가 더 신경 쓰인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똥은 똥이 아니라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과 마주하는 일. 사랑에도 종류가 있다면 태초의 원시적인 날것의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전통적이고 뿌리 깊은 고목나무 같은 사랑의 마음이 똥 기저귀 안에서 솟아난다.
사람들은 아기의 귀여운 면만을 본다.
하지만 이 아이들도 오줌도 싸고 똥도 토도 하고 싸고 머릿내도 나고 입 냄새도 나고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다. 몸이 작아 그 양이 적을 뿐이다.
엄마는 이렇게 아이의 귀엽지 않은 부분까지도 사랑한다.
그러는 동안 객관적 판단력을 잃는다.
우리 아이보다 세상에 귀엽고 예쁜 아이는 없다며 sns를 아이로 도배를 하게 되고 이 완벽하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위해서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결국엔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거라도 생각한다.
그렇게 아이의 예쁘지 않은 모습까지도 사랑하면서 엄마는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만들어낸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존재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귀여운 외모나 기대에 부응하는 능력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먹고 싸는 일에 대한 대견함과 그것을 문제없이 만들어 주고 싶은 것이 바로 엄마의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