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분류
하루의 지리멸렬한 일상이 담겨 있는 옷들이 아무렇게나 뭉쳐져 빨래통에 모여있다.
꼬릿 한 냄새가 묻은 빨래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면서 하얀 빨래 검은 빨래를 구분해 세탁기 안에 거칠게 밀어 넣는다.
세탁
세제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향을 선택하고 적당량보다 살짝 적게 넣는다. 그래야 왠지 착한 빨래를 하는 기분이 든다. 세탁 2회 헹굼 3회로 지정하고 탈수는 강으로, 수건을 빠는 날에는 건조 30분을 돌려 빨래를 뜨겁게 만든다. 그래야 간혹 덜 말라 생기는 너무 싫은 그 냄새가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세팅된 세탁기 안에 빨래를 맡겨놓고는 다용도실에 문을 닫고 나온다.
아무도 보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빨래들은 아주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돌아가는 통 안에서 이리저리 혼이 빠지게 굴러다닌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탁기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 옷에 묻은 하루의 흔적들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세탁기는 신이 난 듯 노래를 한 소절을 부른다. 나는 그 단음의 멜로디를 듣고서야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자각하게 되고 세탁기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꺼내기
하루의 흔적을 잃어버린 빨래들이 강력한 소용돌이를 맞아 아까의 꼬릿 한 우리네 냄새 대신 향긋한 세제 냄새를 가득 머금고 있다. 탈수하는 동안 각자 하루의 안부를 물으면서 서로에게 물든 빨래들은 마지막 탈수과정에서 아쉬움에 서로를 격하게 껴안았다. 자칫 그들을 함부로 꺼냈다가는 서로의 강렬한 포옹에 옷감이 늘어날 수도 있으니 천천히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며 꺼내야 한다. 게다가 어느 날은 아빠의 넓은 와이셔츠가 손바닥보다도 작은 아이의 양말을 품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아이의 목욕수건이 나의 속옷을 품기도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꺼내 털어버렸다가는 재수 없으면 베란다에 먼지 구덩이에 빨래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최대한 그들의 꼬인 관계를 알고 꺼내야 실수가 없다.
빨래 널기
난 그것들을 널기 위해 바구니에 담아 베란다로 나간다.
비어있는 빨랫대와 햇살은 이미 습기를 빨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빨래들을 기다리고 있다. 집안일의 반복되는 지루함과 축축한 빨래의 설렘이 한데 섞여 묘한 기분을 만들어낸다. 빨래 널어 주는 기계는 왜 나오지 않는지... 투덜거려본다. 생각해보니 이미 건조기가 보편화되어 빨래를 너는 사람은 별로 없지 싶다.
빨래를 꺼낼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한 장씩 꺼내 들고는 그들이 완전히 독립한 사실을 깨달았다면 인정사정없이 턴다.
상사의 잔소리와 차가운 형광등의 빛과 지루한 모니터의 빛, 그리고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서 실랑이하느라 스쳤을 타인들의 짠내가 빨려나갔지만 남편의 목 뒤에 흐르는 자존심과 스마트함은 빨아지지 않았다.
세탁소에서 받은 철사로 된 옷걸이에 그 자존심과 스마트함이 구겨지지 않도록 그리고 어깨가 도드라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고 햇볕이 제일 잘 드는 곳에 넌다.
큰아이의 티셔츠는 아무렇게나 벗어서 그런지 늘 뒤집어져 있다. 축축하고 좁은 옷소매를 뒤집으려면 느낌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다 마르고 난 뒤 어차피 뒤집어 개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냥 지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조심히 뒤집어 털어보니 먹다 흘린 귀여운 얼룩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마르면 좀 연해지려나?’ 아마 얼룩은 연해져도 아이의 귀여움은 연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귀여운 공룡이 그려져 있는 옷. 이게 뭐라고 입을 때마다 좋다며 공룡 소리를 내는 모습이 생각나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난다. 티셔츠는 빨아졌는데 아이의 귀여움은 여전히 덕지덕지 묻어 있다.
작은아이의 내복에서는 다 빨았는데도 불구하고 아기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도 젖 먹는 아이의 옷에는 늘 젖 냄새와 침 냄새가 섞인 고소하고 앙증맞은 냄새가 세제와 섞여 묘한 향기를 풍긴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아기 냄새라고 부르는데 나는 잘 안다. 그 아기 냄새의 정체는 바로 엄마의 젖 냄새와 아이의 침이 섞인 냄새라는 것을 말이다. 그 냄새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이 간지러운 냄새는 아이가 이 앙증맞은 옷을 더 이상 입지 못하게 되면 사라진다. 섬유유연제로도 없어지지 않는 이 강력한 아기 냄새. 다른 옷과 섞어 빨아도 이 아기 냄새는 본인의 옷에서만 난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좀 더 오랫동안 맡고 싶어 진다.
그렇게 한 벌 한 벌 걸고 나면 세탁바구니 안에는 자잘 자잘한 양말과 속옷들이 남는다. 이것들은 문어발처럼 생겨 빨래집게가 달린 곳에 하나씩 하나씩 집어 넌다. 작아도 하찮아도 제대로 대접받는 기분일 거다.
그렇게 옷가지들은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세탁기를 통과하고도 본래의 향기는 잃지 않고 꿋꿋하게 새로운 내일을 맞는다.
말리기
내일의 설렘과 일상의 체취를 또 써 내려갈 빨래들은 햇살 아래에서 새 노트처럼 반듯하게 마른다. 치열한 주름 대신 햇살이 담뿍 담겨 따듯하고 묘한 햇살의 향기를 품기 시작한다.
어떤 이의 입김도 서리지 않은 깨끗한 바람과 몇 광년을 달려왔지만 아무도 맞지 못했던 새 햇볕을 빨래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이 품었던 축축한 습기와 강렬한 세제 냄새를 덜어놓는다.
햇살이 가득 담긴 마른빨래에서는 햅쌀로 갓 지은 쌀밥의 하얗고 뽀얀 냄새가 난다.
개기
햇살을 머금어서 그런지 조금 힘이 들어간 뻣뻣한 빨래를 산처럼 쌓아놓고 손에 잡히는 대로 차례차례 개다 보면 마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정성스레 접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일 이 옷을 입고 또 하루를 즐겁게 보낼 아이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새 햇살과 바람을 담아 고이 접어 보내는 것 같은 기분.
서랍에 넣기
그렇게 빨래를 개고 같은 서랍에 넣을 옷가지들끼리 분류한다.
그리고는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둔다.
다시 빨래
아침이 되면 가족들은 각자의 서랍에서 각자의 깨끗해진 옷을 꺼내 입는다.
그 옷에는 세탁기 속에서 함께 엉키며 녹아든 서로의 체취가 묻어있고
고이 접은 엄마의 마음이 들어있고 새 바람과 새 햇볕이 들어있다.
그래서 비싼 옷은 아니지만 자존감을 지켜줄 향이 나고
고급옷은 아니지만 몇 광년 달려온 햇살이 듬뿍 담겨 환한 냄새가 나고
명품은 아니지만 나의 정성이 들어가 있다.
가족들은 같은 향이 나는 옷을 입고는 서로의 향을 맡아가며 하루를 새롭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