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구부러져있던 허리와 어깨를 편다.
“흐으윽~”
기지개를 켜니 왜 이렇게 시원한 거야.
그 모습을 보는 아들 녀석이 웃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웃음 포인트가 당황스럽지만 아이의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 자꾸 보고 싶은 맘에 기지개를 무한대로 반복해서 켠다.
아이는 반복적으로 웃는다. 아니 더 크게 웃는다.
"까르르까르르."
너무 웃었는지 웃다가 뒤로 벌러덩 누워버린다.
그리고는 눈을 비벼가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방금 그 웃음은 잠투정하기 전에 엄마에게 주는 마지막 서비스였을 것이다.
아이는 눈을 비벼가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우리 아이는 잠투정이 심하다. 잠을 자는 것이 이 아이에겐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
나랑 더 놀고 싶어서? 여태 어디선가 잠들어있다가 내게 와서?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이해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가끔은 인내심에 한계가 와서 아이가 울다 지쳐 잘 때까지 내버려 둔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한두 시간은 거뜬히 울어재꼈다.
낮잠 전쟁.
나도 힘들지만 아이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자는 날엔 낮잠을 세 시간도 넘게 자기도 하는 걸 보면.
그렇게 악을 쓰며 에너지를 다 소진한 후에 온몸에 힘을 빼고 자는 아이를 보면 아이에게 화났던 감정은 어디론가 가고 이 작은 눈에서 흘린 눈물과 작은 목에서 낸 절박한 울음들이 내 마음에 와서 콕콕 박힌다.
그리고 아까 울었던 모습보다 내 작은 행동에 자지러지게 웃었던 예쁜 아이의 목소리와 웃음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본다. 그리고 미소가 나도 모르게 지어진다.
자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 그건 사랑이 없이는 조금 힘든 일이다.
온몸에 힘이 빠져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있는 사람은 아무 감정이 없다.
오로지 보는 사람의 감정이 그 사람에게 담긴다.
그리고 그 모습은 흡사 우리가 마지막에 누군가에게 보여줄 모습과 같아서 자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연민에 싸인다.
위 그림은 조선 초기 종실 화가였던 이암(李岩)이 그린 모견도(母犬圖)이다. 자는 아이를 쳐다보고 있으면 난 저 그림이 살포시 떠오른다. 적극적으로 젖을 찾아 먹는 어린 강아지들에게 젖을 내어주고 등에서 잠을 자고 있는 어린 강아지를 지켜보는 어미개의 눈빛과 자태가 너무나 엄마로서 공감이 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조선초 동물화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데 그 이유는 화면의 배치나 묘사 혹은 기교가 뛰어나서도 있겠지만 자는 아이를 보면서 느낀 감정이 어미개의 눈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린 강아지를 연민 혹은 걱정되는 눈으로 바라보는 어미개의 눈엔 곧 사랑이 담겨있다.
한껏 꾸미거나 혹은 애써 예쁜 표정을 짓고 자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런 생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꾸밈없는 순수한 모습으로 자고 있는 사람을 보고 미소가 지어진다면, 얼굴을 쓸어보고 싶다면 그건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걸 증명하는 걸지도 모른다.
엄마들은 아이가 잘 웃어서 혹은 귀엽게 생겨서 사랑하지 않는다.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 이유가 된다..
자는 아이 머리맡에서 사랑스럽게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에게 잘못했던 일을 반성하고 고해성사하게 되는 이유도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신성할 만큼 소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뿐만 아니라 남편도, 우리 엄마도, 내 동생도 가족 모두... 자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보게 된다면 한 번쯤은 이런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떨 땐 자고 있는 그 사람의 인생이 천천히 달리는 기차처럼 진한 여운을 남기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한 번쯤은 그 사람의 삶을 응원하고 사랑한다고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남편은 내게 줄곧 이런 말을 많이 했다.
"넌 잘 때가 제일 예뻐."
아래 그림은 이런 생각들을 하며 그려본 본인의 작품들이다.
수면. 활동을 쉬는 것. 잠을 자는 일.
영면. 영원히 잠드는 것.
어쩜 그 차이는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자. 이제 우리 지금 자고 있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러 가자.
그리고 얼굴을 한번 정성스럽게 쓸어보자.
그리고 마음속으로 한 번 고백하자.
많이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