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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Apr 04. 2017

Eureka 08 "아이큐 50 내 동생, 조반니"

"모든 사람은 천재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하지만 물고기들을 나무 타기 실력으로 평가한다면, 물고기는 평생 자신이 형편없다고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탈리아 마차리올 가문의 둘째인 자코모 마차리올은 자신의 막내 동생인 조반니의 위대함을 세상에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

딸 두 명에 아들 하나. 2대 1. 불공평. 어린 자코모는 늘 남동생이 있었으면 했다. 남동생이 태어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하며 직접 조반니라는 이름까지 지어주고, 조반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물까지 사놓은 자코모.

조반니는 21번 염색체가 남들보다 한 개 더 많은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그 생김새도 행동도 자코모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별한 동생이었던 조반니. 그러나 커갈수록 점점 조반니의 특별한 행동이 잘못된 행동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자코모. 자코모는 그런 동생이 부끄러워 남들에게 동생의 존재를 숨기고 동생에게 화를 냈다.

조반니는 어떻게 다시 자코모의 슈퍼히어로가 되었을까? 조반니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라질 필요가 없었다. 조반니는 원래 천재였다. 물고기를 나무 타기 실력으로 평가해 온 것은 자코모였다. 달라진 것은 자코모다.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바꾸었을 뿐인데, 조반니는 자코모에게 다시 슈퍼히어로가 되었다.


- 목차 -

1. 다운증후군,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2. 핵심 인물 소개.

3. 작품 해설. (다운증후군 조반니를 이해한다는 건 무엇일까?)




1. 다운증후군,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이 말을 꼭 먼저 해두고 싶다. 이 책은 다운증후군에 대한 책도, 장애에 대한 책도 아니다. 자코모의 성장 스토리, 슈퍼히어로 조반니의 이야기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또한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성에 보내는 찬사, 사랑의 이야기로 읽혀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다운증후군에 대한 소개로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 책을 읽었거나 읽을 사람들이 조반니의 관점을 더 잘 이해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다운증후군이라는 이름은 최초로 질환의 특징을 기술한 영국인 의사인 존 랭던 다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의사는 21번 염색체가 두 개인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21번 염색체를 세 개 가진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인’ 외모와 지적 ‘장애’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납작한 얼굴, 꼬리가 올라가고 덧 살이 있는 눈, 작은 귀·코·입, 작은 키, 짧은 손·발가락, 낮은 지능. 그 외에도 수많은 건강상의 문제들과 언어·행동의 발달 지연.

우리는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장애를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장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장애를 고쳐야 할 무언가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고쳐야 한다.’에서 ‘고쳐야 하는가?’로의 전환. 조반니를 치료하기에 앞서 무엇을 치료하고 무엇을 치료하지 않을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다. 조반니는 담뱃갑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조반니에게 고칠 점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뀔 수 없는 것을 바꾸라고 하는 것, 지킬 수 없는 규칙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우리는 장애를 고치고 치료하려 하기 전에 우리가 변할 수는 없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이 장애다. 이를테면 스키를 타고 싶은데 다리를 다쳐서 스키를 탈 수 없는 것. 물론 다친 다리를 치료해서 그 장애를 없애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장애 자체가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면? 조반니에게는 장애가 없다. 조반니가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조반니의 가족과 이 세상이다. 조반니의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 조반니를 치료할 이유는 없다. 조반니를 위해서 우리가 변하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축제 때 흩뿌려지는색종이에 대해 생각해보자색종이들은 접히고 오려져 3초 동안 공중에 있다가 땅에 떨어진 뒤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환경미화원에게 치워질 용도로 작은 포대 안에 갇혀 수개월수년을 기다린다나와 조반니는 이런 일에 반대했다.”

우리는 사람이지 색종이가 아니다. 조반니는 사람이지 담뱃갑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태어나지도 않는다.

조는 아침 햇살 같았다닫힌 덧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막을 수 없는 햇살조는 액체고 피할 수 없는 존재다조는 제어할 수가 없었다조는 모든 구멍모든 빈틈으로 들어왔다.”

자코모의 세뇌 교육은 통하지 않았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변함없이 사랑하는 거란다.”

자코모와 조반니 어머니의 말이다. 조반니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2. 핵심 인물 소개.


마차리올 가문

자코모 : 마차리올 가문의 둘째. 조반니의 형. 이 책의 화자. 어린 시절에는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난 조반니를 이해하지 못해 조반니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중학교 시절엔 초등학교 친구인 비토를 제외한 학교 친구들에게 조반니의 존재를 비밀로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 키아라 누나와 동생인 앨리스, 친구 비토, 브루네와 스카, 아리안나 등에게 영향을 받아 조반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조반니 : 마차리올 가문의 막내(넷째). 이 책의 주인공.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남. 시도 때도 없이 엉뚱하고 특별한 말과 행동을 하는, 자코모의 슈퍼히어로.

어머니와 아버지 : 자코모의 아버지와 어머니. 다운증후군을 단순한 병으로 치부하지 않고, 다운증후군을 가진 막내 동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키아라 : 마차리올 가문의 첫째. 자코모의 누나. 자코모에게 삶이 꼭 정해진 각본대로 흘러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자코모는 키아라에게, 조반니가 어떤 당황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먼저 나서지 말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앨리스 : 마차리올 가문의 셋째. 자코모의 동생이자 조반니의 누나. 조반니는 앨리스에게, 다운 증후군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모욕을 주지 않고 원만하게 상대하는 방법을 배운다.     


자코모의 친구들

비토 : 자코모의 초등학교 친구. 자코모가 중학생 시절 모두에게 숨기고 싶어 했던 조반니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던 유일한 친구. 아직 조반니를 세상에 드러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자코모의 말을 헛소리라고 비판한다. 조반니는 사람이지 담뱃갑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영원히 숨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브루네와 스카 : 자코모의 중학교 친구들. 자코모는 이들의 음악 취향만으로 서로 최고의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여긴다. 훗날 자코모가 오랫동안 그 존재를 숨겨온 조반니를 우연히 보았을 때 전혀 놀라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조반니와 함께 합동 연주를 한다.

 아리안나 : 자코모가 짝사랑했던 친구. 중학교 시절 대중음악을 싫어하는 자코모가 자신의 개성을 숨기고 유명한 대중음악을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발표하는 것에 실망한다. 훗날 조반니와 함께 아리안나를 우연히 만난 자코모는, 아리안나가 조반니의 손을 잡고 조반니가 이끄는 곳으로 다정히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조반니의 다운증후군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3. 작품 해설 <다운증후군 조반니를 이해한다는 건 무엇일까?>


i> 조반니의 음악 속으로조반니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다운증후군 조반니가 사는 세계는 어떤 곳일까? 이 책은 조반니가 살고 있는 ‘중생대’로 여행을 떠난 자코모의 이야기다. 자코모가 조반니를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 자코모는 조반니를 이렇게 생각한다.

조반니는 춤을 췄다조반니는 춤을 춘다문제는 조의 음악이 조 자신에게만 들린다는 것이다.

들어 보았는가?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자들에겐 춤을 추는 자들이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글쎄그때 나는 조의 음악 속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니체의 말은 멋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멋있는 것은 아니다. 니체의 말은 조반니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멋있다. 들을 수 없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어린 자코모의 생각처럼, 우리가 조반니를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적당한가? 글쎄, 우리는 사실 조반니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조반니야말로 우리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 조반니에겐 우리가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바로 이 깨달음이야말로 조의 음악 속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니체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조반니의 음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조반니에게는 스테고사우르스가 있었다.”

조반니는 복종을 요구하는 사회적 규율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조반니는 고무로 만들어진 스테고사우르스 인형에 푹 빠져서는 앞으로 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할 친척들과 작별인사도 하지 않는다. 헤어질 때는 꼭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며 조반니가 이해할 수 없는 관습이나 규칙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이 조반니를 이해하는 행동일까?

무대를 뛰쳐나와 관중들 사이를 가르며 가족에게로 돌진하는 모세 조반니. 산타클로스와 모래, 잔디를 무서워하는 조반니. 닌텐도 위를 집어던지는 조반니. 꼬마 자동차를 입에 넣는 조반니.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조반니. 축구의 규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자기편 골대에 골이 들어가도 좋아하는 조반니. 과연 조반니에게 훈계나 다그침이 효과가 있을까?

우리에게는 조반니가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조반니에게는 우리보다 스테고사우르스가 훨씬 소중할지도 모른다. 이때, 내가 옳고 조반니는 그르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조에게 우리의 생각을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조는 더 많은 실책을 한다. 규칙을 가르치고 잘못을 깨닫게 하고 무언가를 시키려고 노력하며 신경질을 내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자코모는 이것을 마치 공룡 디플로도쿠스에게 발끝으로 춤을 추는 법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조반니는 중생대에서 잘 지내고 있다.”

조반니가 빠져 있는 마법의 세계의 거실에는 텔레비전이 있던 곳에 호수가 있고, 책들 사이로 나무들이 있으며, 카펫이 깔려있는 대신에 대초원이 펼쳐진다. 디플로토쿠스가 창턱 위에 놓인 엄마의 꽃들을 먹고 있고, 머리 위로 프테로사우르스가 날아다닌다. 스테고사우르스는 소파 뒤에 숨어 있다. 얼핏 잘못돼 보이지만 잘못된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조반니가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반니의 음악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조반니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조반니를 우리의 틀에 맞추려 하지 말고, 우리와 세상을 조반니의 틀에 맞게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조반니를 이해한다는 것은 조반니를 우리 세계로 데려오려고 하지 않고 조반니는 중생대에서 우리는 우리 세계에서 각자, 그러나 함께, 잘 지내기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스팩 프러시 스냅’이라는 둘만의 암호를 만들어 조반니와 인사를 나누는 데에 성공한 자코모처럼.     


ii>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까?

조반니는 자코모의 형제다. 자코모가 조반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형제로서 당연한 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조반니에게 필요한 것은 자코모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자코모처럼 조반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자코모는 이 책을 ‘다운증후군을 위해서’ 혹은 ‘장애인들을 위해서’ 쓰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자코모가 이 책을 쓰면서 진정으로 바란 것은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의 도래다.

장애인, 게이, 자신만의 음악에 빠져있는 무명 가수, 대중음악을 듣지 않는 자코모, 중생대에 사는 조반니. 우리는 세상이 이렇게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대적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다양성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신경질을 내곤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하며 세상에 신경질을 내던 자코모의 경험에 따르면,

다운 증후군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는 건 그들이 다운 증후군을 모욕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자코모가 말하는 설득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모욕적인 말과 행동을 삼간다. 유머와 반어법을 통해서 특별한 게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증후군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성은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다양성에서 애정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다양성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코모와 조반니의 이야기에서 깨닫게 되는 가장 경이로운 사실은, 세상은 다양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세상은 자코모보다도 먼저 조반니의 다양성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조반니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 조반니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조반니의 특별함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부모님. 조반니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 세상은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습으로 조반니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조반니를 설득하는 일에 인생을 걸었다는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 조반니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조반니의 친구, 의사와 전문가들. 조반니가 담뱃갑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하는 비토. 조반니에게 놀라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으며 함께 즐겁게 연주하는 브루네와 스카. 자코모에게 조반니가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키아라 누나. 조반니를 모욕하는 상대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앨리스. 해변에서 만난, 조반니의 장난을 사랑해준 독일 사람들. 조반니의 손을 잡고 조반니가 가자는 곳으로 함께 걸어가는 아리안나. 조반니의 그림에 10점 만점을 준 미술 선생님.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 노란색 테두리가 그려진 VIP 주차장과 같은, 조반니를 위한 사회적 대우. 조반니만을 위한 최고의 공연을 선사한 가수 모레노. 그리고 조반니의 스토리 속에 언제나 함께 있는 자코모. 세상은 이렇게 셀 수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조반니의 다양성을 사랑해온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는 이름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과연 조반니는 어떤 사람이 될까? 어쩌면 조반니의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조반니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우리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자코모는 다양성을 모욕하는 사람들과의 투쟁이 때론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자코모 그 자신도 오랜 기간 동안 다양성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적대적으로 대해 왔다. 다만, 자코모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욕보다 설득이 효과적인 게 아닐까?     


iii> 천재 조반니조반니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다음은 조반니의 음악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한 자코모의 말이다.

「나는 이전까지 결함처럼 느꼈었던 다운 증후군을 가볍고 유쾌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데 내 동생 이 모자란 놈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분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어떻게 그딴 식으로장애인 동생에게 모자란 놈이라니?”

상관없다내 동생은 수영장에서 나에게 휴대전화를 던졌다나쁜 놈내 동생은 내 지갑에서 동전을 훔쳤다나쁜 놈내 동생은 자기 여자 친구에게 내 농구 실력이 형편없다고 말했다나쁜 놈그래내 동생은 나쁜 놈게다가 바보교활한 놈이다어쩌면 세 가지 다일 수도 있다어떤 사람에게 화가 나는 것도 사랑해야 가능한 일이다나는 내 동생을 나쁜 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조반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다운 증후군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조반니는 조반니다. 조반니는 사람이다. 조금 특별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특권이나 동정·연민·위로·보호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키가 큰 사람이 있고 키가 작은 사람도 있으며 다운 증후군인 사람도 있다.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다운 증후군인 사람도 있다.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며 다운 증후군인 사람도 있다. 중요한 건 조반니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다운 증후군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조반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따라서 조반니를 어려워하거나 무턱대고 보호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가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놀리기도 한다. 조반니를 놀릴 수도 있다. 애정을 담아서. 친해지고 싶고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그래서 조반니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조반니를 바보라고 놀렸다면 조반니의 바보 같은 모습까지 사랑하면 된다.

조반니를 위한 사회적 대우들은 우리가 다운 증후군을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에 부여하는 특권이 아니다. 조반니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을 똑같이 누릴 권리가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모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 알 수 없는 타이밍에 소리를 지르는 조반니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조반니를 위한 특권이 아니라, 조반니가 사람이기에 당연히 타고난 권리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조반니의 음악 속, 중생대로 들어가서 생각하는 방법이다. 조반니는 어떻게 생각할까. 조반니는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할까.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서로의 음악 속으로 들어가 서로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방법이다.

누구나 비밀이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조는 평범하다. 아니, 조는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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