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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Jun 07. 2017

"그대, 나를 먹어도 좋아."

'예의 없음'은 정상이다.


군 시절의 이야기다.

'남자다움' 중독자나 군대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 지나친 예의범절 주의자들은 이 글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이건 꼭 남자한테만 하는 말은 아니다.


각 잡힌 군대 문화가  마냥 멋있어 보이는가?

낙오자, 폐급, 예의 없는 새끼, 가정교육 안 받은 쓰레기, 병신, 미친 새끼, 무식한 놈, 뇌 없는 새끼, 장애인, 게이 자식. 그 시절 나는 이름도 참 많았다. 개새끼, 씨발놈처럼 흔해 빠져서 들어도 별로 기분 안 나쁜 별명들은 빼놓고도 이만큼이다. 그중 어떤 이름으로 나를 부르든, 나는 "이병 이준기"라고 대답했다. "네? 시발, 방금 뭐라고요?"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영창도 다녀와야 되고, 맘에도 없는 반성이란 걸 해야 되고, 아무튼 귀찮아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도 어느덧 조금씩 선임병이 되어 갔고, 하나 둘 후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소위 '후임병 관리'라는 걸 해야 됐는데, 내 생애를 통틀어 나한테 주어졌던 임무 중에 그만큼 어려운 일은 진정 없었다. 그건 후임병이 잘못했을 때 탈탈 털어대는 것이야 말로 선임병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우겨대는 '참군인'들 때문이었다. 세탁기에 넣고 빨래 돌리듯이 탈탈 털어야 한다나 뭐라나? 나는 사람을 혼내는 게 안 되는 사람인데 말이다. 사람을 뭐하러 혼낸단 말인가? 혼내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혼내지 않아도 바꿀 수 있고, 혼내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이해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참군인'들은 이런 내가 후임병 관리를 못한다며 나를 탈탈 털어댔지만 그래 봤자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를 조금이라도 바꾼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내 손을 잡아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이다. 때로 내 나약함을 따끔하게 혼내더라도 내 마음을 이해하던 사람이거나.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선임 대접을 못 받는 것을 "후임한테 먹혔다."라고 표현한다. 소위 '먹힌 선임'을 많이 봤는데, 대부분 군대의 조직문화를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거나 친목을 위한 사적인 농담을 어려워하는 사람. 쉽게 말해 대인관계 기술, 사회적 기술이 부족한 사람 말이다. '참군인'들은 그런 사람들의 자질이 조직생활을 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털어야(혼을 내야) 한다고 지껄였지만, 예의 없는 쓰레기인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대인관계 기술과 사회 기술이 부족한 사람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군대라면, 그들을 배려하는 조직 문화가 반드시 확립돼야 한다. 근 20년 동안 학습된 개인의 기질을 '탈탈 털어서'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은 이루어질 수 없을뿐더러, 설사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비인권적이다. 전체를 위해 다양한 개인을 획일화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생각은 독재의 전주곡일 뿐이다. 폭력과 혐오와 배제로 대체 무엇을 바꾸겠다는 말인가?


나는 후임병한테 잘 보이고 싶었다. PX에 데려가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다. 힘든 일은 같이 하고 싶었다. 나는 책을 읽고 후임병은 리모컨을 잡았다. TV가 시끄러우면 내가 도서관(?)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요' 쓰기, '네' 쓰기, 주머니에 손 넣기, 선임병 마주 보고 옷 갈아입기, 선임병 흔들어서 깨우기, 선임병이 장난 걸 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되묻기, 말끝 흐리기, 암구호 잊어버리기, 선임병한테 장난치기, 해야 할 일 안 하기, 이등병이 누워 있기, 다른 선임병 험담 하기, 뭐든 나한테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다른 선임병 앞에서 그러면 혼날 수도 있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나는, 좋게 표현하면 '착한 선임병'이었고 나쁘게 표현하면 '먹기 좋은 선임병'이었다. 먹기 좋다는 표현이 기분 나쁘지 않다. 후임병에게 먹히는 게 나한테는 별 일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선임이라는 이유로 예의 차리기를 바란 적 없다. 사람대 사람으로 모욕감을 느끼면 화날지 모르지만, 선임병 대접 같은 건 받고 싶지 않다. "감사히 먹겠습니다."라며 나를 감사히 먹겠다는 후임병의 장난조차 귀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 대놓고 먹히려 해서 맛이 없어 보였기 때문인가? 후임병들은 날 먹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의를 지켰다. 역시 사람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자신에게 예의 차리지 말아 달라는 사람한테 조차 예의 없이 행동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하물며 존경할 마음이 안 생기는데 존경하라 그러면 존경하겠는가? 그런 척하는 거지.

친절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임상 3년 차 새내기 작업치료사다. 짧은 기간이지만 정말 많은 실습생들을 만났는데, 가끔은 우리 치료사들이 실습생을 군대 후임병 대하듯 대한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갑들은 법조차 잘 안 지키는데, 세상의 을들은 지켜야 할 예의가 왜 이리도 많을까? 우리는 왜 스스로 꼰대가 되어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본인을 '선생님'이 아닌 '선생'이라고 부르라던 과외 선생님이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바치고도 배울 수 없는 진리를 그 과외 선생님께 배웠다. 수학 선생님의 탈을 쓴 철학자. 떠올리려 애쓰면 수학 이야기보다는 사랑 이야기, 술 이야기, 본인 인생 이야기를 해주시던 모습이 더 많이 떠오르는 선생님. 내가 존경하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사람. 존경심은 '님' 자 따위에 담겨 있지 않다는 진리. 나는 존댓말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존대가 있는 세상과 존대가 없는 세상 중 하나를 택하라면 존대가 없는 세상을 택하겠다.

진정한 존경심의 비밀은 평등한 관계 속에 있다.

존대가 없다고 해서 존경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가식이 없다고 해서 예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 없는 여자는 자전거 없는 물고기와 같다는 명언이 있더라. 예의 없는 후임은 손가락 없는 소나무와 같고, 싸가지없는 실습생은 엽록소 없는 손가락과 같다.

'예의 없는 xxx'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본인이 예의가 없더라. 우리의 정상 기준이 잘못된 것이다. '예의 없음'은 사실 정상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까지 만난, 지금 만나고 있는, 앞으로 만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대, 나를 먹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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