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bulddae Jan 18. 2024

유독, 유난히 '그런 날'이 있다.

거짓말만 하는 사람은 결국, 피노키오가 되겠지-아이는 아직 이말을 믿는다

어렸을 때였다. 이모가 화투장을 몇장 뽑으시더니,

"오늘은 비가 오고 국수를 먹겠구나" 한 날이 있다. 그러고 나서 오후에 진짜 비가 조금 내렸다. 국수를 먹었나? 이모가 오후에 신속하게 얼른 끓여낸 국수를 먹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모는 음식솜씨가 좋고 손이 빨라, 우리 집에 오시면 '휘리릭 탁탁'해서 얼른 요리를 해주셨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이모처럼, 화투로 내 운세를 점칠 수 있을까. 국수를 먹거나, 비가 오거나. 이건 가볍고 재밌는 일들은 물론이고, 화가 닥치거나 이사를 하거나-하는 큰 일도 미리 알 수 있을까. 알 수 있다면 언제쯤 알 수 있을까. 당일 오전? 하루 전? 한달 전? 이 늦은 나이에 지금이라도 화투나 역학을 공부해야 하나. 요즘은 미래를 궁금해할 틈 없이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가지만, 커피를 많이 마셔 잠이 오지 않는 날 밤엔 하염없이 미래가 궁금해지고, 동시에 불안해진다. 불안을 잊으려 억지로 잠을 청하지만 결국 날 잘 수 있게 하는 생각은 '어쩔 수 없어. 고민한다고 달라질 게 없잖아' 라는 체념 뿐이다.


오늘은 종일-정확히는 이 문구를 저장한 약 2주일 전엔


하루 종일 누군가를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누군가의 요청으로 그 사람에게 내가 아는 정보를 열심히 중개한 날이었다.

'이 사람 어때요?'라고 평판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나는 '여러 분야를 돌며 경험이 많을 지 몰라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 많은 회사에서 단 한번도 성과를 낸 적이 없는 걸로 안다'고 솔직하게 전했다. 내 의견이 그 사람의 채용 여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 지 모르지만, 나를 믿고 평판을 물어봐준 사람에게 영양가 없는 인재를 마냥 칭찬할 순 없었다.

'선배, 이 회사 어때요?'라고 이직을 염두에 둔 후배가 물어왔을 때, 나는 그 회사를 출입했던 과거 10년 동안의 기억을 더듬어 그 회사의 상황과, 지금 현 시점의 시장 영향력, 그리고 회장의 성향까지 낱낱이 고하고 '얼른 원서를 넣어라. 그리고 ㅇㅇㅇ선배에게 연락해 그 회사에 꼭 가고 싶다고 어필해'라고 조언했다. 후배는 괜찮은 인재이고, 그 후배가 가서 일하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적극 추천했다. 나는 잘 됐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러고나서 또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는데, 먼 타국에 살며 결혼을 준비하는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동생은 결혼반지를 맞출 집을 알아보는데, 내가 반지를 맞춘 집이 어떻냐고 물어봤다. 4년 전 한번 방문했던 그 집을, 네이버 지도나 그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고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았던 그 집 연락처를 찾기 위해 옛날 폰까지 뒤져 간신히 문자 하나를 발견했다. 사장님에게 연락해 아직도 반지를 맞출 수 있는지(영업을 존속하고 계신지...워낙 오래 전 일이니 말이다) 현 시세와 희망 디자인까지 전달하고 나자 견적이 나왔다. 견적을 동생에게 전하자 동생은 흡족해하며 '3월에 한국에 들어가면 반지부터 맞춰야겠다'고 했다.


오늘은 그런 날, 사람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날인가보다-- 옛날에 알고 지내던 음악평론가가 '나는 이 바닥의 컴퓨터 서버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라기에 그게 무슨 뜻이냐 묻자 '여러 사람이 접근해 필요한 정보를 찾는 서버 말이야. 그럼 나는 중간에서 이쪽 사람과 저쪽 사람을 연결해주는 거지. 중간 다리 역할.'이라 하기에 '그런 쓸 데 없는 생각 말고 글이나 쓰시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날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하루동안 내가 다리같은 사람이 되어 있다니. 문득 그날 평론가에게 했던 핀잔이 스스로에게 필요한 순간이다.


'쓸 데 없는 생각 말고, 일이나 하쇼. 글을 쓰던가.'


그러나 그날부터 20년이 지나는 동안, 다리역할을 한 게 어디 오늘 하루 뿐일까.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다리가 되었었다. 특히 여러 업체와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오래 했으니, 가볍게 혹은 무겁게 '만남'을 주선한 일이 허다했다. 누군가 소개팅을 해주기도 하고, 업체 대표와 기업 대표를 만나도록 해 업무협약으로 이어지게 한 적도 있다. 나에게 뭐 하나 떨어진 건 없지만, 그것도 내 보람 중 하나라고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그날이 쌓여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된다.

하루의 운세가 쌓여 올해의 운세가 되고,

올해의 운세들이 쌓여 나의 진로가 되고, 가족이 되고, 건강이 되고, 인생이 된다. 오늘의 내가 바로 지난 43년 간 하루하루 어떻게 살았는지의 결과물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진실.


그런 날들이 있고 그 하루하루를 그냥 넘기면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 

뭐라도 하나 해보고자 열심히 달리다 보면 나는 열심히 산 사람이 되겠지.


배고프다. 얼른 집에 달려가 남편과 아이와 함께 저녁밥을 먹고 싶다. 그리고선 푹 잘 자고 싶다. 하루를 열심히 산 사람만이 잘 수 있는 아주 단잠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가 자기를 부르기만 기다리는 애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