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 들렀다.
두 번째 글은 핸드폰 사진으로 시작.
언젠가 송내역에서 엄마가 말하길, "여긴 원래 포도밭이었어." 했었다. 아니, 나는 날 때부터 여기가 지하철역이었고 번성한(?) 동네였는데, 엄마 어렸을 땐 포도밭이었다고? 정말 말도 안 되게 낯설었다.
이 날은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여기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렇게 높은 아파트가 생기다니.
타일도 좋고 공중전화도 좋다. 현금 없는 버스가 생긴 것처럼 공중전화 없는 곳들이 생길까? 아무래도 쓰는 사람은 많이 없겠지만, 더 늙으면 이제 영화에서나 보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지하철 티켓을 살 때면, 엄마가 나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었다. "누가 물어보면 4살이라고 해야 해." 다행인지 나는 8-9살 까지도 아주 작았기 때문에 역무원에게 아무 의심도 사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거짓말을 시키니까 정말 곤란하고... 엄마한테 왜 지금은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물어봤고 엄마는 나를 이해시키지 못했지만 뭐 어린이가 어쩔 수 있나. 개찰구 들어갈 때마다 어마무시 두근두근했다.
초등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길이 이렇게 복잡했었나. 40분 정도, 길게 걸으면 한 시간. 그때는 지루한 줄도 몰랐다. 같이 다리 아래를 걷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항상 한 명씩 별 이유 없이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던 그런 시절, 여러모로 깊은 상실감을 알아가던 시절이다. 나는 오늘 집에 같이 가자는 말이 제일 좋았다.
어렸을 때 내가 제일 사랑한 친구는 민희였는데, 민희가 중간에 전학을 가버리는 바람에 난 항상 전화기 앞에서 민희 전화만 기다렸다. 엄마가 먼저 전화를 받으면 "민희야?"라고 물어봤다.
3학년 때는 할머니 댁에서 신세 지고 있을 때라 할머니 댁 전화번호도 알려줬다. 그리고 그 노력이 아깝지 않게 할머니 댁으로 전화해 준 민희.. (엉엉) 아직도 내 어렸을 적 앨범엔 민희의 독사진이 있다.
근데 이상하다. 왜 내가 기다린 기억만 있을까? 나는 민희 번호를 안 받았을까? 나중에 엄마한테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육교 넘어서
다시 우리 동네 골목 초입.
동네가 시작되는 사거리 비슷한 곳이다. 사진에 보이는 쪽으로 쭉 걸어가면 인천민우회 (구) 사무실이 나온다. 나 어렸을 땐 엄마가 종종 "고가까지 걸어가자"하면 이 길이었다.
이 길 끝에는 어린이 소극장이 있었고, 아빠가 썸 타던(?) 언니의 치킨호프집도 있었다. 우리 동네는 왼쪽 철물점 길로 들어가면 나온다.
다시 여기! 짠.
여기서부턴 보통 혼자 걸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지나다녔던 건물의 벽과 창문을 그대로 다시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누가 살까, 할머니가 살까? 건물의 앞부분은 철물점인데 안쪽엔 방이 있을까?
그땐 키가 작아서 넘어볼 수는 없었는데, 이제는 창문이 꽤 눈높이에 있다.
동네 교회 골목 앞. 할머니 의자들이 즐비한 곳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폐가인가 보다. 동네 곳곳에 주인 없는 집들이 늘어난 것 같아 조금 맴이 쓰렸다.
동네 교회가 아직도 있다!
친구 따라 저 교회에 간 적이 있다. 초코파이랑 요구르트를 주셨는데, 입 안이 깔깔한 것이 같이 먹기에 좋은 조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교회 예배당 벽에 걸린 예수님 사진을 보고 '예수님 정말 저렇게 생겼어?' 물어봤던 기억. 신이라서 어딨 는지도 모르고 본 적도 없다면서 어쩜 저렇게 그렸을까 신기했다. 사실 친구도 예수님이 저렇게 생겼는지는 모른다고 엄마한테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 선생님들은 어쩜 이렇게 친절한지, 난 그 친절이 참 좋았지만 간식만 먹으러 가는 거면 정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 다시 가는 건 좀 고민스러웠다.
말고도 엄마가 당부하길, 거기는 원래 천 원씩 내야 하는 곳이라 많이 가면 안 된다고 했다. 천 원이나 내야 한다니. 그래서 그렇게 친절했구나.
여긴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던 동네 구멍가게가 있었다. 지금은 황해도 순댓국집이 된 모양.... 근데 영업은 안 하시는 것 같다.
초등학생 때 뭘 사가지고 나오다가 할아버지가 세워둔 오토바이 배기통에 화상을 입었었다. 놀란 가게 할머니가 뛰쳐나와서 내 다리에 소주를 들이부었는데, 아니 내가 아파서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갑자기 소주를.. 붓다니? 싶었다.
나중에 왜 소주를 부었는지 물어봤는데, 민간요법이라고 하셨다. 어려운 단어.. 민간요법. 그 민간요법이라는 건 뭐냐고 집에 와서 엄마한테 물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어쨌든 이후로 나는 절대 오토바이 옆에 서지 않는다. 다리에 있던 화상자국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이 가게를 지나면,
바로! 내가 살던 빌라가 있다.
저기다! 익숙한 외벽이 보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반가웠다.
주변은 다 헐려서 공터 흙밭이 되었는데...
너는 아직 굳건하게 남아있구나.
반가운 빌라 현관.
작은 빌라 두 동이 마주 보고 있는데, 항상 A동 아주머니들이랑 B동 아주머니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자리가 여기였다.
나는 인사를 잘하는 302호 딸내미로 소문이 자자해서 아주머니들 사이를 지날 때면 조금 어깨가 으쓱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바른 어린이.
머릿돌.
어렸을 때 저 머릿돌의 존재가 참으로 궁금했다. 머, 릿, 돌, 하고 뒤에 쓰인 이름까지 아무리 꼼꼼하게 읽어도 이게 도대체 뭐 하는 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가 건물의 머리인가? 서주호 씨는 뭘 한 건가. 1993년에 지어졌다는 것만 어렴풋이 추측하고, 살면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생각한 것 중에 하나였다.
나중에 삼촌에게 물어봤더니, 건물을 짓고 나면 '이건 누가 언제 지었소' 쓰는 이름표라고 했다. 아무래도 건물을 짓는 건 꽤 대단한 일이니까, 그래 이름표도 이렇게 돌로 만들어 붙이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건물 주변에서 혼자 머릿돌을 찾아내고 '역시. 여기도 있어!' 하고 혼자 뿌듯했음 (ㅋㅋㅋ)
집 뒤로는 산이 있다.
예전에 엄마에게 어쩌다가 여기로 오게 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대답이 새삼 순수했다. 내 동생은 태어나서부터 인큐베이터에 오래 있었고, 집에 와서도 이러저러 몸이 아프다가 결국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었다.
그래서 당시 엄마와 아빠가 생각하길 공기가 좋은 곳으로 가야겠다고 내린 결정이란다. 여기는 동네 끝이라 집 값도 싸고 뒷산도 있으니 공기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뒷산이 있다는 이유로 공기가 좋을 거라는 결정이,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는 시절의 순수 같은 걸까 싶어 잠깐 마음이 울렁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의 유년기 내내 밖으로 나돌기만 하던 아빠가 어느 순간에는 엄마와 협력(?)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을 거라 생각하니 그것도 참 새삼스러워 기분이 묘했다.
혼자 콕 박혀 놀곤 했던 담벼락 아래. 지금 보니 더럽고 컴컴한데 저기서 무얼 했나 싶지만 어렸을 때는 그냥 멍하니 앉아있기도 하고, 성냥으로 작은 불장난도 하고, 돋보기로 비닐도 태우면서 놀았다. 그땐 바깥쪽으로 커다란 가스통이 세워져 있어서 안쪽이 보이지 않았던 게 좋았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가스통 옆에서 불장난을 하다니 미쳤지.
지금은 누가 살까? 집 안의 나무문은 그대로일까? 오돌토돌한 유리가 달려있는 미닫이 문을 정말 좋아했었는데. 건물이 낡은 것 같지만 또 그대로인 것 같아서 신기했다.
93년에 지은 집이면 벌써 몇 년이야? 대단해. 혼자 안 헐리고 남았으니 서주호 씨는 뿌듯할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 나는 조금 힘들었는데, 어디다가 힘들다고 말을 못 했던 것 같다. 왜냐면 내가 가장 안 힘든 사람 같았으니까. 잘못한 것도 없이 장애를 가졌다는 동생도 힘들어 보이고, 동생도 키우고 나도 키워야 되는 엄마는 더 힘들어 보였다. 아빠는 집에 있으면 자꾸만 성질을 부렸고, 집안 물건들을 잘 부쉈다. 그러니까 엄마는 정말 힘들었겠지.
쉬는 날이면 아빠는 항상 출장이나 상갓집에 가야 한다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고, 며칠이고 아빠가 들어오지 않으면 엄마는 나를 시켜 아빠 삐삐에 목소리를 남겼다.
그렇다 보니 내가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한다거나 선생님이 날 다른 공부반에 잘못 넣어줬다거나 뭐 그런 거는 말할 게 아니었다. 가끔은 숨쉬기가 힘들어서 육교 마지막 계단에 앉아 눈을 꼭 감고 있거나 집 옆 담벼락 아래 숨어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엄청나게 크고 엄청나게 작은 공기 같은 것들이 나한테 덤벼들고, 숨을 들이쉬면 내 안에 들어온 공기방울이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분명 눈앞에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압도당해 버리는 기분에 눈앞의 사물 크기를 분간하기도 어렵고, 그러면 나는 푹 주저앉아서 눈을 꼭 감았다.
그런 순간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는데 설명하기도 어려워서 누구한테 말해본 적도 없다.
나중엔 나를 짓누르는 그 이상한 공기 덩어리를 배추라고 생각하자고 결심했다. 왜 배추였을까?
그래서 사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작은 배추, 큰 배추...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배추라니... 그리고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배추 증상은 점차 사라졌다. 뭐였을까? 사실 좀 부끄럽고 웃긴다.
한 바퀴 집을 돌고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해가 많이 졌다.
나무 모양이 예뻐서 찍었다.
더 멀리서 찍으면 노을도 찍혔을 텐데
바로 뒤에 건물이 있어서
더 뒤로 갈 수 없었다... 아쉽다...
그리고 동네를 돌아 나가는 골목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는데,
나머지는 다음 글에 적어야겠다.
아이고, 길게 썼다.
내 유년기에 작별을 고하리라.
그냥 혼자 시작한 작은 결심.
이번 글도 읽어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