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코노미
하루하루 전부 다른 '오늘'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어제와 비슷한 오늘, 그리고 오늘과 비슷할 내일에 대한 지루함 때문이었을까요?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영화가 따로 없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던가요.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 남은 날 중 가장 젊은 날을 기록해야 싶었나요. 혹은 의식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우린 각자의 이유로, 어느 순간 '쓰는 사람'이 됩니다.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어떤 것에 푹 빠져있는 소위 '덕질'하는 사람들은 온종일 파고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것에 대해 씁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쓰기도 하죠. 혹은 관심 있는 대상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려고 시도하는 것은 '삶'에 관한 글이죠. 누구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제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나'에 대해서, 내가 겪은 '오늘'을 쓰는 것. '에세이'라고 부르는 장르. 맞아요. 어려울 것 없죠. 특별한 기술이나 경험, 지식이 없어도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은 주어지고, 각자의 역할대로 충실히 오늘을 구성해 가니까요. 그렇다면 매일같이 쓸 것이 넘쳐나는 것 아닐까요?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별거 없어 보이는' 에세이 쓰기가 참 쉽지 않다는 거예요. 시작조차 못하고 매년 결심만 더하기 일쑤죠. 한두 번 시도하다가 흐지부지 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고요. 왜일까요?
어쩌면 '나와 내 삶, 일상을 쓰는 것'에 대한 선명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너무 익숙한 '에세이'라고 불리는 장르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한 번도 나만의 생각을 정리해 본 적 없기 때문 아닐까요.
오늘은, '에세이 이코노미'의 첫 시간.
많은 사람들이 '에세이 작가'인 저에게 묻곤 합니다.
그럴 때면 자주 이렇게 대답합니다.
" 에세이는 핸드드립 커피와 같아요. '나의 삶'을 원두로, '쓰는 이'를 필터 삼아 내리는 각자의 고유한 향기를 가진 글이죠. 그렇게 쓰인 에세이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인 '한 사람'의 맛과 향, 질감과 온도, 색을 가져요. 그것이 반복되고 훈련되면 '그 사람만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하고요."
어떤가요? 저만의 '에세이 정의'가 와닿으시나요? 이 답을 듣고 난 사람들의 얼굴 위에는 다양한 표정이 떠오릅니다. 아! 하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끄덕임, 여전히 알쏭달쏭하다는 듯 데구루루 굴러가는 눈동자, 그리고 음-하고 새로운 고민에 빠져버린 살짝 주름진 미간.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에게도 이 정의는 시간이 꽤 걸렸거든요.
기억나지 않는 자그마한 아이였을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 '일기'를 썼죠. 그리고 그날의 인상 깊은 일이나 감정을 기록하던 아이의 일기에서 시작된 쓰기가 나이를 더해가며 자연스럽게 '에세이'로 진화했다고나 할까요. 오로지 '나'만을 독자로 가지던 '일기'에서, '불특정 다수의 타인'을 독자로 가지는 '에세이'로. 어떻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일기는 대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나 나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도구로 쓰입니다. 하지만 '에세이'는 다릅니다. '나의 삶에 일어난 사건이나 그로 인한 감정, 경험, 지식, 생각... 쓰이는 글의 재료는 일기와 같지만 그것을 쓰는 의미는 '나의 에세이를 읽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에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볼까요?
막 피어나는 봄날, 3월의 어느 수요일. 매일 아침 마주치는 목련나무의 가지 끝에 맺힌 꽃몽우리가 처음으로 열린 것을 발견한 순간의 설렘과 기쁨. 그것을 '일기'와 '에세이'로 쓴다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일기라면 간단히 적어두면 충분합니다. '아름다운 봄의 시작을 발견한 오늘.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는 목련나무의 가지 끝에 드디어 꽃몽우리가 열리기 시작했다. 진짜 봄이 왔나 보다. 덕분에 오늘은 하루종일 괜히 설렜다.'이 정도면 훌륭한 일기가 되지 않을까요?
에세이라면 같은 순간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 경칩이 지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이렇게 추울까. 이른 출근길, 아직은 쌀쌀한 바람에 괜히 봄을 원망하며 익숙한 버스정류장에 선다. 습관처럼 올려다본 목련나무의 가지 끝자락, 톡 터진 팝콘처럼 하얗게 벌어진 한송이의 꽃을 발견하곤 숨을 멈추고 만다. 아아, 봄이 정말 왔구나. 꽃샘추위의 얄궂은 심술에도 지지 않고 씩씩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구나. 봄이 왔다고, 봄은 반드시 제시간에 도착한다고 알려주려고. 보드라울 그 여린 꽃잎이 차가운 바람에도 기세 좋게 고개를 든 것이 어쩐지 뭉클해서, 움츠렸던 어깨를 쭉 펴본다. 그러고 보면 삶은 사계절을 닮았다. 한없이 매서운 겨울이 왔다가도 언젠가 반드시 봄이 온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봄을 믿어주는 것. 목련 꽃 몽우리를 톡 틔워, 봄이 왔다고 알려주는 기척을 놓치지 않고 발견하는 것.'
이렇게 쓴다면, '봄이 왔다는 것을 발견한 아침의 출근길'이라는 재료가 '누구에게나 삶의 고단한 시절이 있지만, 반드시 끝이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매서운 계절이 지나가면 화창한 날이 도착하는 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러니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는 의도를 가진 '에세이'가 됩니다.
겨울이 되어 마른 잎이 떨어지고 힘없이 꺾인 가늘고 긴 가지 끝에 단 한 잎, 벌레 먹은 듯한 잎이 남아 있었다.
...
지금까지 단풍잎은 예쁘게 물들었을 때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벌레 먹고 색이 바랜 잎도 멋진 존재였다. 자연은 이렇듯 근사한 예술을 만들어 낸다. 나는 그 단풍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에 담고 마음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수많은 나뭇가지 중에서 이 가지 하나를 골라낸 선생님의 감각에 새삼스럽게 감동을 받았다. 백화요란한 날에도 메마른 겨울날에도 무한한 초목 속에서 이런 나뭇가지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무한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이 그 사람의 세계를 결정한다.
-모리시타 노리코, '계절에 따라 산다'
어떤가요? 한 장의 벌레 먹은 바랜 잎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에세이가 쓰입니다. 정말 멋지지 않나요? 쓰면 쓸수록, 에세이만큼 한계가 없는 쓰기의 장르도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