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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Mar 20. 2024

에세이를 처음 쓰려는 분에게

에세이 이코노미

당신의 '첫 번째' 에세이는 언제 쓰였나요?


어떤 날,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혹시 아직인가요?

어쩌면, 오늘일까요?



사진: Unsplash의Estúdio Bloom



오늘은 왠지 글이 잘 쓰일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꿈도 없이 푹 자고 일어난 일요일 아침.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질 만큼 개운한 기분으로 내다본 창밖의 하늘마저 완벽합니다. 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부드러운 햇살과 새파란 하늘 사이로 달콤한 뭉게구름이 걸려있네요.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 하나 없는 여유로운 주말, 바로 오늘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더는 미룰 수 없어요. 오늘을 놓치고 나면, 또 언제 이런 완벽한 날이 올지 알 수 없으니까요.


백 퍼센트 충전을 마친 노트북을 챙겨 들고 자주 가는 단골카페로 향합니다. 책 읽기에 시끄럽지 않은 음악이 흐르는 아담한 공간은 사장님의 취향과 닮은 조용한 손님들로 채워지는 곳입니다. 그동안 이곳에 올 땐 '독자'였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가방 안에 책은 없습니다.



사진: Unsplash의Hans Isaacson



카페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찰랑-' 익숙한 소리와 함께, '작가'인 내가 입장합니다.


'독자'로는 단골이지만 '작가'로는 첫 방문인 셈이죠. 늘 마시던 따뜻한 커피 대신, 모든 문장마다 적확한 단어를 떠올릴 수 있도록 뇌를 깨워줄 차가운 커피를 주문합니다. 바 안에 서있는 사장님을 등지고 앉는 창가자리, 가장 왼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합니다. 수없이 들락거렸던 공간, 습관처럼 앉았던 이 자리. 사계절을 몇 번이고 관람했던 창밖의 풍경... 모든 것이 익숙한데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사진: Unsplash의Toa Heftiba



주문한 커피가 도착하는 순간, 노트북의 전원이 켜집니다. 새하얀 화면 위에 속눈썹 한가닥이 떨어진 것 같은 커서가 일정한 속도로 깜빡입니다. 어서 쓰라며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괜한 생각이겠죠. 대체 첫 문장을 무어라 써야 할까요? 괜히 목이 타는 것 같아 차가운 커피를 한숨에 절반쯤 마셔버립니다. 그리고 손에 묻은 물기를 바지 위에 대충 문질러 닦고 자판 위에 두 손을 올려둡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왼손 검지가 움직여 첫 번째 자음을 눌렀고...



사진: Unsplash의Mark Wong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나요? 잘 기억이 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노트북 오른쪽 구석의 시간을 확인하니 세 시간쯤 흘러있네요.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져 가고 남아있는 절반의 커피는 얼음이 녹아 투명해졌습니다. 노트북 안의 새하얀 화면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잘 정돈된 문장들이 제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어제의 독자가 오늘의 작가가 되는 것은, 터널을 통과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출구를 예상할 수 없는 캄캄한 터널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순간, 무모함 혹은 용기로 두 발을 내디뎌 터널 안으로 풍덩 빠져들고 나면, 저 앞의 빛이 순식간에 가까워집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게 만드는 두려움을 떨쳐내며, 한발, 두발, 점점 속도를 내 그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렇게 몸집이 커지던 빛이 와르르 쏟아지는 순간, 훌쩍 바깥으로 나와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계. 바로 '쓰는 사람'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쓰기'.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읽히는 사람으로 변하고 싶다면 반드시 써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요. 그러니 오늘 처음 에세이를 쓰려는 당신이 할 일은, 쓰는 것뿐입니다. '잘 쓰는 일'은 아주 먼 훗날의 고민이니 미뤄두세요. 오늘은 노트북을 열고, 새하얀 화면 위에 문장을 늘어놓으면 됩니다. 테트리스 고수라도 된 듯, 단어와 띄어쓰기와 쉼표, 그리고 마침표를 알맞은 곳에 두세요.


그렇게 오늘부터 당신은 쓰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
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설가가 되려는 것과 같은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도 없이 '지금이라면 뭔가 나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그럴듯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하고 느꼈던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물론 하루키처럼 운명적인 처음을 겪어야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단순한 일이에요. '쓰고 싶다'라는 기분과 '쓴다'는 행위를 연결하면 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하루키처럼 엄청난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른 일이지만, 내 삶을 에세이로 쓰며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의 처음은 언제였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 글을 써보자'라는 마음을 먹었던 순간. 혼자 쓰고 혼자 읽던 '일기장'에서 벗어나 '발행'버튼을 눌렀던 그날. 하루키처럼 날짜까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꽤나 두근거렸던 것은 생생합니다. 내 삶을 재료 삼아 빗어낸 나의 글을, 자그마한 배에 태워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 올려두었죠. 어디의 누구에게 도착할지 알 수 없기에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느껴지던 그때, '쓰는 사람'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Unsplash의Thom Milkovic



그 후로 '삶을 전부 씁니다'라는 문장을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쓰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은 삶의 가장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고 난 후가 되겠네요.






혹시, 지금 터널 앞에 서있나요?


어서 뛰어드세요! '쓰는 사람'의 세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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