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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Aug 30. 2020

나는 왜 배우가 되었을까

“왜 연기를 시작한 거예요?”

내가 연기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오디션 장에서, 대학원 면접장에서,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 앞에서 나는 수도 없이 ‘내가 왜 배우가 되려고 하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나는 10대 시절 착실하고 모범적인 성실한 학생이었고, 좋은 대학에 가서 변호사나 외교관, 공무원 같은 직업을 얻는 게 부모님의 바람이자 내 평생의 목표였다. 


수능을 한 번 망쳤지만, 재수를 해서 어찌어찌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생활에도 꽤 만족했다. 사회학이라는 전공도 흥미로웠고 내가 다니던 학교 특유의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문화도 맘에 들었다. 진로를 결정할 때도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행정고시를 보기로 결정했다. 그 정도면 부모님에게도 자랑이 되고,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시 공부를 일 년 정도 하고 시험을 한 번 쳐보니 왠지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우선 먼 미래의 명예와 지위를 위해 나의 청춘과 현재를 희생하는 데 지쳐 있었다. 그건 대학 입시시절만으로 족했다. 다음으론, 내가 아직 해보지 않은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많은데 너무 섣불리 내 삶을 결정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고시 공부는 이 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이후 고민했다. 나는 뭘 원하는 걸까. 그러다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어려서부터 꿈꿔 온 직업적 판타지. 사람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연설하는 모습. 그 판타지를 가지고 한 때 외교관을 꿈꾸기도 했던 나였다. 그렇다면 말과 관련되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직업이 뭐가 있을까. 아나운서가 떠올랐다. ‘아, 아나운서가 되어볼까?’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이유로 아나운서 준비를 시작했다. 덕분에 아나운서 아카데미도 다녀보고 수많은 크고 작은 방송사에 100개가 넘는 이력서도 뿌려보았다. 거듭되는 실패에 이골이 났을 무렵, 작은 기업에서 기업체 취재를 다니는 리포터로 일을 시작했고, 다음엔 지역 교통방송에 입사했다. 거기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고, 제작하며 나름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계속 채워지지 않았다. 더 가보아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말이다. 


‘배우가 되고 싶다.’ 


이 때 쯤이었던 것 같다. 공공기관에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말에 치맥을 먹으며 혼자 드라마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 작은 생각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 때부터 배우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난 그 분야엔 문외한이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주변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또 무섭기도 했다. 괜히 이상한 사람을 만나 사기나 당할까봐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다.  나에게 ‘학교=안전한 곳’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공공기관에 들어간지 8개월만에 퇴사했다. 일단 마음이 생기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뛰어드는 편이라 퇴사 결정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짧은 직장생활이었지만 내가 태생적으로 조직생활에, 특히 위계가 분명한 문화에 취약하다는 걸 깨달으니 퇴사가 그리 아쉽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와 작은 입시 연기학원을 다녔다. 나는 이미 학부를 나왔으니 대학원에 가는게 내가 쌓아온 경험과 경력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조언에 따라 대학원 입시를 준비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 위해 달려왔는데 이제와서 그걸 다 내팽겨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연기를 배우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연기는 하고 싶었다. 울면서 버텼다. 내가 원했던 대학원 중 하나에 입학했다. 그렇게 내 연기 여정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자, 다시 이 글을 시작하게 한 첫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왜 연기를 시작한 거예요?” 라는 질문에 거두절미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이렇다.


어느날 (치맥 먹으면서 드라마 보다가) 문득 연기가 하고 싶어져서요.


하지만 이런 대답을 하게 되면 


A.    하필이면 그 ‘어느날’이 여덟살도 열여덟살도 아닌 스물여덟의 어느날이어야 했는지.

B.    왜 안정된 직장을 그만뒀는지

C.    학창시절엔 왜 연기할 생각을 못했는지.. 


등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 인생의 시작부터, 키워진 배경, 부모님과의 관계, 나란 사람의 성향까지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다 하기엔 시간도 없을 뿐더러, 사람들은 내 실제로 인생사 따위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는 편의상 ‘진실’보다는 ‘부분으로서의 사실’을 이야기 하기로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나의 답안은 이렇다.


 A.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B. 내면의 더 깊고 다양한 감정을 표출해보고 싶어서

 C. 어려서부터 TV를 끼고 사는 매니아였는데 그 영향으로

 D. 허구의 이야기인 연극이나 영화 속의 삶이 때론 진실을 더 잘 드러내는 것 같아서


이 답안은 각기 나름의 진심을 담고 있다. 하지만 완벽한 본심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글을 빌려 내 본심을 고백해보고자 한다. 


나는 그냥 배우가 되고 싶었다. 연기가 하고 싶었다. 어느날, 문득, 갑자기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경위를 아직 명확하게 찾지는 못했다. 과거의 행적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통해 몇가지 단서들을 얻었으나 그것이 나의 이러한 '기이한 선택'을 오롯이 설명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기에 나도 섣불리 지금 답을 단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당신들이 나에게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 ‘괜찮은 배우’가 되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을 치는 과정을 통해 철저히 규명해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왜 연기를 시작했나’에 대한 질문에 깔린 보이지 않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이십대 후반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안되는가?

안정적인 봉급을 받으며 사는 정착된 삶이, 하고싶은 일을 따라 사는 불안정한 삶보다 나은가?


이런 전제가 없다면 나는 위 질문에 대하여 조금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냥, 어느날, 문득, 연기가 하고 싶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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