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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Nov 22. 2020

할머니의 눈물

“내가 너한테 얼마나 기대했는데..”


평범한 하루였다. 소소한 외부 일정을 마치고 여느 때와 같이 이른 저녁 즈음 집에 도착했던 나였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소파에 누워 신나게 통화하는 엄마가 보였다. 어딜 가나 적극적이고 거침없는 엄마는 전화통화 조차도 토크 프로그램에 나온 출연자처럼 한층 업된 모습으로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엄마의 전화통화 소리를 들어보니 통화 상대는 할머니였다. 내게 남은 유일한 조부모님, 외할머니. 나의 엄마의 엄마 말이다.


엄마는 스포츠 캐스터처럼 일을 마치고 들어온 내 모습을 할머니에게 중계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휴대폰을 나에게 넘겨주며 ‘할머니한테 사랑한다고 해’라며 뜬금없는 대리 효도를 요구했다. 대학 때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취업했던 직장도 때려치운 이후 가족들 보기 민망해 명절도 끊은 지 오래. 죄송한 마음만 마음 한편에 끼고 살던 나였는데 엄마의 성화로 얼떨결에 할머니에게 사랑고백을 했다.


“할머니 사랑해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런데 할머니가 갑자기 우시는 것이었다. 덩달아 나도 눈물이 났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할머니도 슬프고 할머니를 슬프게 한 내 존재도 슬퍼졌다. 할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기대를 얼마나 했는데...

순간 할머니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막 죄책감에 깃든 그런 미안함은 아니었다. 세모로 태어났는데 동그라미였으면 좋겠다고 하는 할머니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앞으로도 자기를 깎아 작은 동그라미가 될 생각은 없는 이기적인 세모의 미안함이랄까..? 어쨌는 나도 괜히 가슴이 아파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물론 할머니는 ‘건강만 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 저 부자 될 거예요. 너무 슬퍼마세요.’라고 했다. 그렇게 통화가 끝이 났다.


통화를 끝내고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역시 배우라 감정이 남다르네.”

그러면서 산통 깨는 소리를 한다.

“할머니도 속물이야.”


이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맞다. 나도 안다. 할머니에게 지금 필요한 건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공무원 손녀,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이어서 돈도 잘 벌고 제 때 시집가는 손녀라는 것을. 그리고 할머니는 그 기대를 200% 충족시키리라고 믿었던 내가 그러지 못해 무척 실망했다는 것을.


지금처럼 살아서는 할머니 살아생전에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방식대로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생각이 없다. 내 방식대로 삶을 격파해가며 그녀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큰 세상에서 더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그녀의 자랑거리가 되고 싶다. 이런 이기적인 손녀를 둔 할머니께 죄송한 마음뿐.



할머니, 미안해요.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혹시 알아요? 할머니 보는 연속극에 제가 나오게 될지.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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