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산 꼭대기 거대 불상과 바다가 맞닿은 절에서 정신 수련하기
상쾌하고 기분 좋은 뉴스로 하루를 시작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여파로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경기 불황,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인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12.3 사건, 본질적인 문제 해결 보다 차기 정권을 잡기 위한 당쟁으로 장기화되고 있는 국정 혼란, 국가적 신뢰와 신용이 바닥으로 떨어져 불안해진 증시. 이토록 세상이 어지러우니, 내 마음도 잠잠할 날이 없다.
밝은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맞을까? 컴컴한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며, 어떻게 중심을 잡아낼 수 있을까? 예전의 나였다면, 신나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로 시끌벅적한 맥주집을 찾았을 것이다. 생맥주가 가득 부어져 있는 차갑게 얼어 있는 유리잔을 쨍하고 부딪히며, 친구들과 신세 한탄을 하고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한바탕 웃고 나면 우울과 불안을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잠깐의 일탈로 찾은 기분 좋은 상태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와 함께 강원도 양양 오봉산에 위치한 '낙산사'에 가기로 했다. 펍(PUB)이 아니면 절(사찰)이라니. 이렇게 극과 극에 놓여 있는 선택지를 떠올렸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많은 절 중에서 낙산사로 향하게 된 이유는 사찰이 산으로만 둘러 쌓여 있지 않아 갑갑함을 얹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둘은 모두 불교신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낙산사의 '템플스테이'를 신청해 보기로 했다. 1박 2일 동안 만이라도 속세를 벗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걷고, 숨 쉬고, 자고 일어나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낙산사 주차장에서 짐을 꺼낸 우리는 가볍게 배낭을 메고 오봉산을 올랐다. 10분여간 오르막을 오르다 보니 홍예문(虹霓門)이라고 쓰여 있는 글씨가 보였다.
그 문을 지나니 오른편에는 푯말이 있었는데 템플스테이 전용 공간이 보였다. 우리가 묵게 되는 숙소(취숙헌)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적인 건물이 아니었다. 검은 기왓장을 쌓은 지붕, 알록달록 문양이 새겨진 대들보, 온담에 새겨진 불교적 색채의 그림, 서까래 밑에 달린 종. 이제야 사찰에 머문다는 사실이 점점 더 실감 났다. 숙소를 배정받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고, 직원 한 분이 우리 맑게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반겨 주셨다.
우리는 사찰에서 생활하기에 앞서 필요한 예절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한옥 지어진 교육장으로 안내를 받은 우리는 디딤돌 위에 신을 벗어 두고 대청마루에 올랐다. 안으로 들어서니 마룻바닥에 새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보라색 비단 천의 좌복(방석) 10개가 두 줄로 놓아져 있었다. 줄의 간격은 스님이 걸어 들어오시며 한 사람, 한 사람과 마주할 수 있도록 지나다닐 수 있는 공간만큼 비워져 있었다.
좌식의자 없이 땅바닥에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가 남들보다 빨리 저려오는 나는 창이 없어 여차하면 벽에 기댈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맞은편 창들이 열려 있었는데, 바닷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 코 끝에 닿았다. 구름이 많고 날이 흐려서 바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심 설레었다. 밖을 내다보려고 한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맞은편에 앉은 아버님 한 분과 눈이 마주쳐버렸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눈을 피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여승 한 분이 교육장 안으로 들어오셨다. 스님께서는 30대 중후반 정도로 나이가 젊어 보이셨는데, '어떤 계기로 스님의 길을 걷고 계신 걸까?'라는 궁금증이 제일 먼저 떠오를 정도였다. 스님께서는 가볍게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열 명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참선할 때 쓰이는 좌복(방석) 위에 똑바로 앉는 방법부터 알려 주셨다. 배꼽부터 머리끝까지 일직선으로 하늘에 닿는다는 생각으로 몸을 곧추 세워 앉아야 했다. 그 자세에서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영 편안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스님께서는 우리에게 머릿속에 잡념을 비우고,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않고 숫자를 세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숫자를 세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면, 다음 숫자로 넘어가지 말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숫자 일(1)부터 시작하라고 하셨다. 나는 다리가 저려오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 자세를 유지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스님께서 앞에 놓아둔 싱잉볼을 땡 하고 소리 내어 치면서 모두를 침묵 속에서 깨우셨다.
"보살님들, 숫자가 잘 세어지셨습니까? 자신이 제일 많이 세어본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보세요."
"저요!"
"네. OO 보살님. 몇 까지 세어 보셨나요?"
"숫자 백(100)이요."
"허허, 보살님께서는 스님 말에 집중하지 못하셨군요. 스님이 숫자 열(10)까지 여러 번을 세어 보라 말하였는데. 그래도 잘하셨어요."
스님 말씀을 충분히 경청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한 걸까? 너무나도 당당히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민망해졌다. 낯빛이 붉어졌는지 얼굴에서 살짝 달아오른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스님의 말씀대로 템플스테이를 하는 1박 2일 동안만이라 스마트폰을 두고 조용히 생활해 보기로 했다. 그 외에 나머지 생활 수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오후 6시 이전에 저녁을 간단히 먹은 뒤로는 금식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셨다. 외부음식을 반입하는 것은 금지되며, 당연히 예고 없이 경내를 벗어나 시내로 나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평소에 하기 어려운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기로 했다. 마음의 평온함을 앗아가는 문명 도구를 손에서 내려놓고, 속세로부터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는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이 지금 내게 필요한 일이었다. 해가 지기 전, 우리는 숙소에 모든 짐을 두고 손을 비운 채 사찰을 둘러보았다. 해가 저물어 가는 오후 5시, 산 꼭대기에서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세음보살의 불상이 세워져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낙산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觀音道場) 가운데 하나로 관세음보살(관음보살)을 모시어 기도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스님께서 설명해 주신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관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들어 고통받는 중생에게 도움을 주시는 엄마 같은 존재"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낙산사 원통보전(圓通寶殿) 축조와 관련하여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는 흥미롭다.
통일신라시대 671년 '의상' 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바다에 투신하려 하자, 바닷가 굴 속에서 누군가(용왕 또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었다. 용왕인지 관세음보살님인지 모를 그 존재는 "나의 전신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말대로 의상대사가 전각을 짓고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니 대나무가 없어졌다.
높은 오봉산 꼭대기에는 거대한 관음보살 불상이 서 있었다. 스님께서는 불상을 보면 합장하여 절 하고, 불상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계방향으로 3바퀴를 돌아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친구를 따라 교회도 다녀보고, 할머니를 따라 절에도 자주 와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를 섬긴다는 것은 내게는 어색한 일이다. 그래도 절에서 불법에 따라야 하니 어르신들을 따라 엄숙한 표정으로 불도를 수행했다.
사실 나는 높이 있는 관음보살 불상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저 먼 땅 아래까지 세상을 굽어 살피고 있는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편안할 수 있을까? 주변 일상에서 화나고 일그러진 표정의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내 얼굴에도 걱정과 한숨 등으로 주름살이 빚어지고, 날이 갈수록 주름이 하나씩 늘어간다.
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관음보살의 얼굴이 평온할 수 있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혹시나 눈을 감고 계신 건 아닐까? 관음보살의 위눈꺼풀이 동공을 반쯤 덮고 있는 듯한 눈가에서 중생을 보살피는 듯한 자애로움이 느껴졌다. 불상 앞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 나는 오른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둑어둑한데 의상대(義湘臺) 앞에 내린 월광이 유난히 밝았다. 사실 밤바다의 거친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바다의 지평선 위로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빛줄기와 달빛을 통해 환해진 바다 빛깔을 보다 보니 긴장된 마음이 풀어졌다. 바닷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부터는 나의 진실된 의지로 명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불자는 아니지만, 난 절의 분위기나 문화가 좋아."
"왜? 자연 속에 있어서? 여기서 숨 쉬기만 해도 걱정이 사라져?"
"그냥 이곳은 세상이나 남을 탓하지 않고 나를 수행하게 만들잖아. 나 스스로가 강인해지고 있는 게 느껴져. 모든 게 별일 아닌 것 같고 말이야."
"오... 여기 온 지 우리 하루 밖에 안 됐는데... 벌써 그런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대화를 나누다가 일찍 잠에 든 우리는 새벽 4시 알람소리에 잠에서 깼다. 축축한 새벽 공기에 무거워진 몸뚱이를 어렵사리 이끌고 원통보전(圓通寶殿) 불당으로 향했다. 잠이 쏟아져 오는데 청아한 목탁소리와 경건한 종소리가 울리니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무슨 기도를 하면서 절을 할까 고민했는데, 스님께서는 백팔(108) 배 수행을 위한 기도 주문을 외워주셨다. 무릎을 굽혀 큰 절을 하고 일어나면서 체력 소모가 상당한데도 몇 가지 주문은 나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화내고 성내는 마음을 잠시 바라보며 인내하는 마음으로 절합니다.
험난한 인생길 잘 참고 견뎌온 스스로를 칭찬하며 절합니다.
인생의 험난한 길을 동고동락한 친구와 동료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절합니다.
생명의 원천이 되는 공기와 물 자연과 우주의 한없는 은혜에 절합니다.
내가 옳다는 교만심으로 다른 이와 대립하는 마음은 없는지 돌아보며 절합니다.
상대의 마음을 오해하여 나쁘게 받아들이는 성품은 없는지 돌아보며 절합니다.
내 생각대로 하려는 마음 때문에 상처 준 사람은 없는지 돌아보며 절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고도 합리화하는데 길들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며 절합니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는지 돌아보며 절합니다.
고난을 헤쳐나가기보다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 없는지 돌아보며 절합니다.
삶에서 겪는 수많은 사건과 두려움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을 알기에 절합니다.
나의 하루는 날마다 좋은 날 좋은 사람 좋은 일로 펼쳐질 것을 믿으며 절합니다.
바라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절망하지 않기 바라며 절합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과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순리대로 받아들이길 원하며 절합니다.
절하면서 느껴지는 충만하고 풍요로운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절합니다.
반목과 질투, 무시와 비난, 경쟁과 불안 같은 내 마음속 감정의 소용돌이가 종식되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와 콧잔등을 손등으로 닦아 내었다. 무겁고 어두웠던 마음이 물에 씻겨 내려가듯이 가볍고 맑아진 것 같았다. 내가 오늘 하루도 살아 있음에 그리고 누군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낙산사에서 나의 몸과 마음을 비워내고 정화하며, 내면의 힘을 당분간은 아니면 그 이상으로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