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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Jun 04. 2019

사랑이라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설군요. 그 기나긴 세월을 몇 개의 단어로 정의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열여덟 살에 결혼을 했으니 벌써 5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넘었군요. 눈과 귀는 점점 멀어 가는데, 기억은 더 선명해지니, 참으로 신기한 노릇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짝을 정해주듯 결혼을 했습니다. 그 사람 눈동자가 어떤 색인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향기를 품고,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전혀 알지 못한 체 서로를 만났지요. 아직도 처음 만나던 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군요. 그 사람은 눈꽃처럼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양 볼과 이마에 조심스럽게 연지를 찍어 바른 체 예쁜 꽃가마에 앉아 있었지요.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기도 하고, 잔뜩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저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지상을 훔쳐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을 곳곳에는 풍악이 울리고 있었고, 수탉은 목청껏 울며 하늘 높이 뛰어올랐습니다. 우리는 수줍게 맞절을 했습니다. 서로에게 영원을 약속했습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달콤한 언약은 순간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고, 쓰디쓴 고통은 영원처럼 머무르는 것이었습니다. 매일이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온종일 허리 한번 펴 지 못하도록 일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닭장에 가서 계란을 줍고, 소에게 여물을 주었습니다. 밭에 나가 고추와 감자를 심고, 논에 나가 모를 심고 벼를 벴습니다. 뜨거운 아궁이에 불을 지펴 따뜻한 밥상을 차렸고, 차가운 개울가로 나가 두 손이 부르트도록 빨래를 했습니다. 늙은 부모를 모시고,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 곱고 희던 그 사람의 손은 늙고 메마른 나뭇가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약속은 공허한 껍데기처럼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긴 시간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늙고, 지친 당신의 손에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제게 고맙다고 말하더군요. 저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자신에게는 행복이었다고 합니다. 새벽을 깨우는 닭의 정겨운 울음소리와 젖소의 가슴에서 나오는 숭고함, 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느끼는 청량함과 벼가 고개를 숙이는 고귀함을 잊지 못할 거라고 합니다. 늙은 부모 마지막 가는 길 배웅하던 일도, 자식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던 일도 모두 행운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차디찬 세상에서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고 합니다.


 나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삶은 언제나 고통과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함께여서 좋았습니다. 때로는 미안했고, 때로는 고마웠고, 또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모든 순간을 함께 견디며 걸어갈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 긴 시간이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질 만큼, 함께한 모든 순간이 행복했습니다.


 산 너머로 노을이 지네요. 나는 이 사람 손을 조금 더 잡고 있겠습니다. 늙고 주름진 손, 더 이상 곱고 희지 않아도, 저에게는 더없이 그립고, 아름다운 그 손을, 아주 오랫동안 만져주고 싶습니다. 그 긴 시간이 찰나의 순간이었다면, 이 짧은 찰나도 순간도 영원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아직은 많이 부끄럽지만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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