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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25 5cycle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25 5cycleⅠ






 1994년 이후 22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폭염, 모기조차 뜨거운 햇볕에 말라죽어 구경하기 힘들었던 여름과의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잠들 때까지만 해도 옆에 머물러 있던 여름은 어떠한 기척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고, 대신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온 가을이 나에게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늦잠 자느라 자리를 밍기적거린 건 여름이었건만 가을이 깨운 건 애꿎은 나의 밤잠이었다.


 확실히 4cycle 때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계절이 바뀐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도 변화의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변화의 징표가 필요했고, 나는 화학요법이 끝나자마자 이발을 했다. 머리를 다듬고 거울을 보았다.

 ‘아, 이제 치료도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조금만 힘내자.’



 길에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다음과 같은 두 질문을 랜덤으로 하나 골라 던져보자. 이 때 Q1에 ‘X’라고 대답한 비율과 Q2에 ‘O’라고 대답한 비율이 같을까?


(Q1) 당신은 건강하십니까?
(Q2) 당신에게 병이 있습니까?


 답은 ‘아니다’ 이다. ‘건강하지 않다.’가 꼭 ‘병이 있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병(有病)상태와 건강상태는 연속적으로 존재하므로 어디서부터는 ‘병’이고 어디서부터는 ‘건강’이라고 딱 잘라 말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의료인은 ‘질병과 건강의 기준’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특히 문화적 배경과 사회적 가치관에 따라, 혹은 기술 및 연구의 발전에 따라 병과 건강을 결정하는 기준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① 트렌스 젠더, 동성애자 등의 성소수자
② 탈모, 성장장애
③ ADHD, 틱장애
④ 당뇨, 고혈압


 ①번. 예전에는 치료나 계도의 대상, 또는 정신장애로 많이 취급되었지만, 요즘은 하나의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이다. 반대로 ②번은 먹고 살기 급급하던 예전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꽤 중요한 문제로 취급된다. 문화적 배경과 사회적 가치관에 따라 치료의 필요성이 달라진 경우다.


 ③번. 아동정신질환은 그저 어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여기며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진단기술의 발달에 따라 점차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을 걸러내고 있다. ④번. 연구가 거듭됨에 따라 예전 기준에 의하면 지켜보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사람이, 개정된 기준에는 환자로 분류되어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술 및 연구의 발전에 따라 병의 범위가 달라진 것이다.


 한때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성관계 파트너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분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시험관아기시술(IVF)의 우선권 문제’ 때문에 나온 문제인데 이는 후자보다는 전자, 즉 문화적 배경 및 사회적 가치관의 변동이 질병의 기준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게 여러 이견이 많기에 WHO에서 정한 건강의 정의는 상당히 철학적이다.


건강이란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양호한 상태이며, 단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다는 것만은 아니다.
(Health is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예과 2학년, 병리학 첫 강의 시간. 교수님이 우리에게 던진 첫 마디는 ‘병(病)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는 스크린에 ‘疾病(질병)’ 두 글자를 띄우고 그 한자에서 드러난 동양의 질병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강의실로 돌아오니 스크린의 글씨는 ‘disease’로 바뀌어 있었고, 강의가 재개되자 ‘disease’는 ‘dis-ease’로, ‘ease’는 다시 ‘aise’로 변환되었다. 말씀하셨다.


불어로 aise는 ‘안녕(安寧)’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dis-ease’는 불녕(不寧), 즉 안녕하지 아니함을 의미하죠.
그렇다면 ‘dis-ease와 disease가 같은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여러 주장들이 있고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의견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앞서 이야기한 한의학적 질병관과 마찬가지로 건강-비건강-질병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국보 319호임과 동시에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1610년에 허준이 저술한 『동의보감(東醫寶鑑)』.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허준 혼자만의 독창적인 저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의보감은 허준이 그 당시까지 나온 수많은 의학 서적을 수집하고 분석한 후, 유효성이 떨어지는 것은 거르고 거른 다음, 중요한 것들을 위주로 뽑아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첨삭한 ‘리뷰 논문’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지금으로 치면 레퍼런스만 해도 100 종류가 넘는 의서들을 집대성한 논문, 진료 매뉴얼, 가이드라인, 백과사전 같은 위치. 『동의보감』이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뷰 논문>

특정한 주제에 대한 기존 문헌들을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현재 이 주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요약하고자 하는 논문


 이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쓰인 책이라면 대개, 앞으로 등장할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중요한 개념과 기초를 서두에 제시하여 이해를 돕도록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래서 『동의보감』도 생명관과 신체관을 설명하는 신형(身形)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락은 《형기(形氣)의 시작》 이며 그 안에는 ‘아(痾), 채(瘵), 병(病)’ 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여기서 아(痾)는 불편함의 발생, 채(瘵)는 불편함의 누적 및 지속, 병(病)은 그것들이 심해져서 증상이 드러나는 상태를 뜻한다. 즉 병(病)에 대한 정의가 시작부터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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