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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27 5cycle Ⅲ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27 5cycle Ⅲ






수술한 지 딱 반년이던 9월 7일, 거의 대부분의 불편이 사라졌다. 그날 나는 머리를 다듬었다. 방사선 치료가 끝난 이후로 왼 머리가 혹시 다시 돋아나고 있지 않은지 거울로 살피는 게 습관이 되어있었다.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시작하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의 말씀에도, 혹시나 두피에 미묘한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 매일 확인했다. 머리카락이 없는 게 너무 불편해서였다. 렌즈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난시의 소유자였기에 안경을 끼지 않고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왼쪽에 머리카락이 없으니 안경을 쓰면 안경테가 직접 두피에 접촉되었고, 그건 꽤나 나를 성가시게 했다. 안경다리에 눌린 피부는 곧잘 짓무르기 일쑤였고, 통증도 자아내어 간혹 두통도 일으켰다. 임시방편으로 안경테에 손수건이나 휴지를 말아 착용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불편해서 나중에는 집안에 있을 때는 그냥 안경을 벗고 지내기까지 했다. 벗겨진 머리는 잠 잘 때도 영향을 주었다. 평소 모로 누워 자는 게 몸이 베인 나였다. 문제는 항상 왼쪽을 아래에 두고 잤다는 것. 습관대로 왼쪽을 아래에 두고 자니 좌측 관자놀이 부근에서 측두동맥이 뛰는 것을 완충해줄 머리카락이 없어 맥박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게 어찌나 요란하던지 마치 베개에서 머리가 들썩거리는 것 같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머리카락의 소중함을 그보다 확실히 전달할 수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는 자라지 않았다. 선생님이 공언한 한 달을 기다려도, 두 달을 기다려도 그대로였다. 오직 오른 머리만 자랄 뿐. 교수님은 기다리면 차차 나게 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스스로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멀쩡한 정신을 얻었는데, 새 삶을 얻었는데 이쯤은 양보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머리카락으로 생명을 샀다면 이보다 더 성공적인 거래는 없다고. 그래서 의논 끝에 가발을 사기로 결정했고, 업체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알아본지 5일 째 되던 날, 왼 머리에서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거울 속에 비친 검은 점을 보자마자 장바구니에 담아둔 쇼핑목록을 모두 지워버렸다. 필요가 없으니까. 그건 내가 일상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9월 7일 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모자를 벗어던졌다.


 이제 어느 누구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나에게 무슨 나쁜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를, 예전 그 모습 그대로가 된 것이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길을 활보해도 된다. 통증도 없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이렇다 할 제약도 없다. 일을 할 수 없고 술을 못 마신다는 점이 있지만, 세상에는 취업준비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금주(禁酒)를 하는 사람이 많다. 큰 흠이 아니다. 이제 남아있는 실절적인 불편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이처럼 6월 6일과 9월 7일이 육체적 차원에서의 불편함이 해소된 날이었다면 7월 13일은 사회적 불편함이 해소된 날이었다. 그날 학자금 대출이 모두 상환되었다.

 한 학기에 5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 그리고 총 12학기. 그로 인해 발생된 6000만원의 채무. 어찌나 무겁게만 느껴지던지 액수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렇게 하여 상위 5%로 졸업한 나의 총 장학금은 고작 1000만원 남짓. 무이자 혜택을 받는 터라 빌리는 게 더 이득이긴 했으나 모아놓고 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항상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지만, 월급을 받으면 그 중에서 바로 100만원을 떼어내어 바로 송금해드렸다. 동생에게 앞으로 들어갈 대학등록금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상환해야 했다. 그다지 많지 않은 월급에서 100만원 제했으니 생활비로 쓰고 나면 별로 남는 돈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욕심은 또 많아 강의도 들으러다니고 놀러가는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따라가니 가랑이가 찢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신세도 많이 지곤 했다. 그렇게 궁상을 떨며 2년간 모은 돈과 이번 진단으로 받은 보험금을 합쳐 학자금 대출을 모조리 갚은 게 바로 7월 13일. 건강과 시간, 수많은 가능성을 빼앗긴 나를 긍휼히 여긴 빚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러나 생각보다 속 시원하다. 개운하다 같은 느낌은 없었다. 선택의 순간에서 대출금에 대한 부담감이 얼마나 발목을 잡아댔는가. 선택권을 제한하던 족쇄를 끊어버린 해방감을 만끽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빚도 갚은 돈도 모두 통장의 잉크로만 볼 수 있는, 실제로는 그 잉크조차 되지 못한 무형(無形)의 존재였던 탓일까, 별 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재발했을 때 치료비로 쓸 돈을 대책 없이 미리 쓴 것은 아닌가 싶은 걱정도 들었고, 아직 다 낫지 않아놓고 재발까지 걱정하는 내 모습을 보며 그동안 나를 억눌렀다던 부담감이 실은 허상이 아니었는지 의구심도 들었다. 안전지향적 선택을 좋아하고 모험 앞에서 항상 머뭇거리는 나에게 대출금은 그저 자기합리화의 도구, 면죄부가 아니었는가 하고.



 타인이 보기에는 이 모든 게 큰 불편이 아닐 수 있고, 따라서 치료의 진해오가는 별 상관없는 에피소드 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치유의 증표였다. 단순히 자발 호흡이 가능하다는 생리적 수준의 생존을 넘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음을, 곧 그렇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이처럼 남의 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시간 속에서 점점 나는 좋아져 가고 있었다. 그게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모두.


 만약 누군가가 모든 일이 끝난 뒤 어떻게 나았냐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가장 먼저 시간을 꼽고 싶다. 그 시간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이 나를 낫게 하였노라고.


 어서 그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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