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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31. 2017

[소설]내려놓음 129 책에서 위로 받다.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29 책에서 위로 받다.Ⅱ






 동생을 학교에 내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방향을 틀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하던 내 마음에 동생의 난리가 얹어졌다. 해소가 필요했다. 목적지는 중고서점. 수많은 사람들의 깊은 사색으로 충만한 공간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기에 평소에도 평화를 사러 자주 찾았다.

 나는 새 책보다 헌 책이 더 좋다. 상대적으로 더 손때 묻은 페이지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밑줄을 통해 지난 주인의 마음을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오래 묵은 산삼이 더 귀하듯 책도 좀 묵혀두어 세월을 먹어야 품위 있어 보인다는 편견도 이에 한몫한다. 더 값싸게 그 책의 지난 세월까지 살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그리고 낡은 겉표지 안에 숨어있는 깨끗한 내지를 보면 다들 찾지 못한 흙 속의 진주를 내가 발견한 기분도 드는 것이 마치 보물섬에 도착한 탐험가처럼 마음을 들뜨게 까지 해줘 자꾸만 찾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차례로 검색했다. ‘박완서, 신영복,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알랭 드 보통, 파울로 코엘류’ 딱 1권 남아있었다. 웬만한 책들은 서점에 들어오는 순간 다 샀다. 그렇다고 다 읽은 것은 또 아니라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방안에 한가득 이지만 자꾸 사게 된다. 한동안 서점에서 계산하고 나올 때마다 결심했었다, 지금 있는 책 다 읽을 때까지 여기에 오지 말자고. 단 한 번도 지킨 적 없고 지켜질 리 없는 약속, 공허한 다짐이라는 걸 알기에 이제는 포기했다. 그냥 심란한 마음을 달랠 방법 중에 이만큼 생산적인 것도 잘 없다고 자위한다. 나중에 한의원하면 북 까페도 같이 운영할 거라고, 그걸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죄책감을 속여먹는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샀다. 고등학생 때 교과서에서 본 기억도 나는 게 반갑기도 하고 무엇보다 꼴찌라는 단어가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

 태어나기로는 장남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셔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은 걸어서 10분에 있는 거리 이모네 집에서 이루어졌고, 띠동갑인 큰누나부터 5살 차이나는 형까지 있는 그곳에서 나는 단연 막내였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종종 “나도 이모 넷째 딸이다!” 라고 자주 이야기했다고 하니, 이모와 사촌누나 셋, 사촌형까지 모두 날 많이 귀여워했던 것이 분명하다.


 동생이 생긴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래서 꼬물거리만 하던 동생과 얼추 의사소통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때쯤엔 나는 중고등학생이 되어 집보다는 밖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 시절이 지나 내가 대학생이 되니 이제는 동생이 중고등학생이 되어 여유가 별로 없었다. 오빠일 시간이 없었다. 


 그 뿐일까. 한의대의 특수성은 나의 막내기질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120명 남짓 되는 동기 중에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온 사람은 30명 남짓. 재수나 삼수는 기본, 심지어 직장 다니다 오신 분들도 수두룩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대입시험을 치렀던 분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실수를 저질러도 ‘막내니까 그럴 수 있지.’ 하며 귀엽게 봐주는 분위기 속에서 6년의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공보의가 되었다. 재수도 하지 않고 대학원도 안 나오고 전문의 과정도 밟지 않았기에 고등학교 조기 졸업자가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은 막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내심 3년 내내 막내를 맡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는데, 2년차 때 나와 상황이 똑같은 우민이가 들어왔다. 그래도 꼴찌나 꼴찌 바로 앞이나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는가, 대접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1년 가까이 세상에서 한발 물러서서 집에서 가족들과 생활 중이다. 아무리 나이 먹어도 부모님 눈에는 내 아가 내 새끼인 법. 오히려 아픈 이후로 그 시선이 더 심화된 듯하다. 한 마디로 난 태어나서 계속 막내, 못 미더워 신경써주게 되는 동생으로 살아왔다. 나의 반지빠르지 못한 면이 이를 더 가속화시켰을지도 모르겠다. 꼴찌라는 말이 굉장히 친숙하다. 주저하지 않고 그 책을 골랐다.


 집으로 돌아와 읽기 시작했다. 노란 색연필을 들어 조심스레 밑줄도 긋고 옆에 메모도 했다. 이제는 습관이다.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박완서 선생님은 자신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독자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게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의 마음상태에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날 나는 수많은 밑줄을 긋고 메모를 남겼다. 그중에서 내 마음상태를 잘 대변했다고 생각되는 메모 3가지만 소개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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