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아르바이트와 끝이 안 보이는 스펙 쌓기로 메말라가는 청춘들. 무채색의 백수지만 꿈과 희망이 있기에 현재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청춘들이 내쉬는 한숨에는 구슬픈 아리랑이 깃들어있다. 면접장에서 느낀 자괴감에 아리고, 쓰리고, 아리아리 할 것이며, ‘다음 기회에’라는 기약 없는 불합격 문자를 바라보는 심정이 아리고, 쓰리고, 아리아리할 것이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구직활동이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잘 알기에, 쉽사리 말을 못 하겠지만, 흐린 구름만 보지 말고, 흐린 구름 뒤에서 취업준비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태양을 믿으며, 구직 활동이라는 긴 터널을 씩씩하게 통과하길 기원한다.
처음 두 발을 혼자 힘으로 디딜 수 있게 됐을 때, 어머니가 신겨준 첫 신발을 기억하는지? 세상은 많이 울퉁불퉁하기에,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시면서 신겨주셨던 그 신발을 신고, 세상 밖으로 나갔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하루 익숙한 풍경을 낯선 주소로 바꾸고, 어렴풋한 기억을 정지된 날짜로 붙잡으며 울퉁불퉁한 세상 위에서 조금씩 때가 타고 닳아진 ‘무수한 발자국’을 한 줄로 압축하는 과정, 그건 바로 취업준비생들이 이력서를 쓰는 과정이다. 누군가는 5cm쯤 위에서, 누군가는 5cm쯤 아래에서 숫자들로 요약되는 삶의 높이를 편집하면서,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인형처럼 반듯한 표정으로 이력서의 작은 칸 속에 자신을 밀어 넣어보지만, 어떻게해도 채워지지 않는 빈칸 앞에서는 한숨만 내쉬었을 취업준비생들의 아리랑이 담긴 이력서를 보면서 ‘취업 희망 편지’를 떠올려본다. ‘취업을 희망하는 편지’ 그건 바로 ‘취업준비생이 회사에 제출하는 입사지원서’다. 딱딱한 입사지원서가 아닌, ‘취업 희망 편지’를 기업에 쓰면, ‘인사담당자가 차가운 채점표를 들이대며 취준생들의 한평생 기록을 수치화는 일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낭만적인 생각에서 시작한 글이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취준생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본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익숙해져 있다. 주어진 시간에 잘 프로그램화된 모범답안을 내어놓는 것처럼 ‘말하고 싶은’ 자의 존재성은 사라지고 없는 현실이다. 오로지 말을 듣는 상대방이 원하는 말이 무엇일까만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말을 듣는 상대방, 즉 인사담당자가 바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사담당자가 진짜로 듣고 싶은 말,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수많은 지원자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물건처럼 구태의연하게 외쳐대는 똑같은 말일까? 성실하고 창의적이며,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리더십까지 갖춘 준비된 인재라는 틀에 박힌 말일까? 인사담당자는 자기소개서를 통해 지원자만의 경험과 생각으로 버무려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스토리를 듣고 싶어 한다.
입사지원서 작성은 수십 년 간 연습해온 연주 실력을 집약해 보여주는 피아노 독주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오랫동안 뼈를 깎는 힘든 훈련으로 갈고닦은 실력을 잠시 동안 발휘해야 하는 올림픽 경기로도 비유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피아노를 전공한 연주자가 연주회 1주일 전에 갑자기 기타로 악기를 바꿔 무대에 올라 기타야말로 운명의 악기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어설픈 연주를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어릴 때부터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위해 평생 피겨스케이팅이라는 한 길만을 달려온 선수가 올림픽 경기 한 달을 앞두고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종목은 스키 점프였다며 갑자기 종목을 바꾸어 출전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사지원서를 작성할 때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일이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진솔하고 울림 있게 말할 수 없으니, 입사한다면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도 말하기 힘들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스스로의 삶을 점검하면서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숙제다. 이 숙제가 끝나면 취업 아리랑은 구슬픈 멜로디가 아닌, 흥겨운 소리로 재탄생할 것이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