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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ullmoon Jan 10. 2022

제주의 아침인사 "당근 안녕!"

제주여행 20박 21일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잠시 우리 집은 모든 것이 한 개 씩이다.

방도 하나, 욕실도 하나, 주방도 하나, 옷장도 하나.

거실은 방이 대신하고, 서재도 방이 대신한다.


넉넉한 것은 창. 욕실에 하나, 방에 둘, 주방에도 둘.

그중 방에 난 창 중 큰 것은 내 손으로 재니 가로 여섯 뼘, 세로가 다섯 뼘으로 제법 크다. 그 창으론 주인 가족이 사는 집과 대문, 주인아저씨의 작업실이 보인다. 아저씨의 직업은 색소폰 수리 전문가. 크고 작은 색소폰들이 줄지어 서 있거나 혹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제법 근사하다. 


큰 창의 반대쪽에는 앉지 않고 서면 눈높이가 딱인 작은 창이 있다. 이 창은 당근밭과 마주한다. 어둠이 덮이면 세상 깜깜하기에 겁 많은 나는 서둘러 커튼을 쳐서 창을 가리지만, 해만 나면 제일 먼저 이 창문을 열고 "당근들 안녕!" 인사한다. 진짜 속내는 '아깝다 당근. 맛나겠어 당근. 다 모아 즙 짜면 족히 열댓 병은 나올 텐데.'

 

구좌읍 곳곳을 산책하다 보면 (내 눈엔) 상태가 좋은 당근들이 당근밭에 저렇게 뒹굴고 있다. 내 눈엔 죄 당근주스로 보인다는.

 

며칠 전 어르신 여러 분이 오셔서 당근을 뽑으시더니 왁자지껄 뽑은 당근의 박스작업을 하셨다. 그리곤 하루 이틀 남겨진 당근을 가지러 오지 않으신다. 실하고 큼직한 당근의 수분이 매일 줄어드는 것을 애가 타 오늘도 나는 얼굴도 모르는 밭주인을 기다렸다. 


고작(?) 스무 밤 동안 한동리 주민이지만 그래도 한동리 주민은 주민이니까 당근주스는 동네에서만 사서 마셨다. 어제는 세화해수욕장에 갔다가 해변 앞 카페에서 습관처럼 "당근주스 주세요"하다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그래, 사람이 의리가 있지. 하여 감귤주스로 변경했는데, 아놔 감귤주스는 또 왜 이리 맛난 거냐고. 


휴롬은 일주일만 좋고 금세 애물단지 될 것이 뻔하며, 자고로 주스란 남이 짜 준 것이 제일 맛나다는 살림 좀 하는 언니, 친구, 동생의 조언에 마음을 접었다. 한데 감귤주스가 그 자리를 차지할 줄이야. 어제 이후 내내 귤 착즙기(세척이 단순하다 함)에 마음을 뺏겼다. 카페에 가도 식당에 가도 바구니에 가득한 '맘껏 가져가세요' 귤들만 보이니 이를 어쩔.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당근밭으로 난 창을 열며 "당근 안녕!" 하겠지. 어제도 오늘도 나는 당연하게 당근처럼 밝은 빛깔로 잘 지내는 중이다. 쮸는 밤만 되면 심심하다며 3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오늘은 급기야 "친구들 보고 싶다. 그냥 방학이 끝나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말해 나로 하여금 당근주스가 땡기게 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제주에서의 나의 아침인사는 당근 "당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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