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그건 좀...
제주에서 쮸와 나는 대화가 둥글다. 매일 만나는 바다 덕분인지, 집 뒤 당근밭 때문인지, 아님 여행중임을 핑계로 집안일이 대폭 줄어서인지 나는 아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생각해서 답을 한다. (그 전엔 대충대충 응, 아니야, 알았어로 답하곤 했다. 그럼 아이는 "엄마, 내가 무슨 말했는지 정말 들었어? 이야기해 봐." 했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쮸는 자꾸 엄마를 부른다. "아유 쫌! 잠 좀 자자구.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나고 그래야 아침이 경쾌할 거 아냐."라는 말은 육지에 두고 왔다. '내일도 10시에나 일어나겠군' 체념하며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인다. 여기는 제주니까.
"엄마"
"응?"
"회사에 가면 다들 야근도 하고 늦게까지 일해야 해?"
"그건, 각자 하기 나름이지."
"그렇게 해야만 하는 회사도 있잖아."
"이젠 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어서 강요가 덜해지지 않았을까?"
"으... 무섭다 회사."
"회사가 왜 무서워. 내가 안 좋아하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무섭지."
"엄마"
"응"
"요즘 애들 장래희망 1순위가 유튜버고 2순위가 돈 많은 백수래."
(헉. 듣기는 했는데 아이에게 직접 들으니 조금 충격적이다. 돈 많은 백수. 그건 상사에 치이고, 고객사에 까이고, 야근과 철야에 찌든 사회인이 할 이야기 아닌가?)
"애들이 몰라서 그래. 일 안 하고 놀기만 해봐. 진짜 그거 재미없고 별로야. 심심하고 지루할 걸?"
"엄마, 그럼 나 이번 방학 때만 체험해 봐도 돼?"
(잉??? 뭘???)
"엄마가 그랬잖아, 돈 많은 백수 막상 해 보면 재미없고 별로일 거라고. 그러니까 이번 방학 동안만 나 한번 해 보면 안 돼?"
"이번 방학 동안 너 돈 많은 백수 한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뒹굴해 본다고?"
"응"
'뭐라니 너. 일단 한 대 맞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살면서 로또에 당첨된다면 하는 상상은 여러 번 해 봤다. 그럼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이나 실컷 할까? 일 년 내내 전국 각지 서점들을 돌며 책 구경을 할까? 제주도 바닷가에 집을 한 채 사서, 매달 친구들을 초대할까? 그런 상상은 해 봤지만 백수가 되겠다는 옵션은 없었다. 사람이 숨이 붙어있는 한 일을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 때문이기도 했고, 목적 없이 논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지 경험해 본 덕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돈 많은 백수'라는 다섯 글자가 아이의 입에서 나온 순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있어. 너 돈 많은 백수 체험할 거라며. 그런데 넌 돈이 많이 없잖아."
"그건 엄마 아빠가 빌려주면 되지."
"어쩌나, 엄마 아빠도 돈이 많진 않은데... 그리고 진짜 돈 많은 백수라서 체험해 보고 그 길이 내 길이다 가는 건 말리지 않을 건데, 엄마 아빠는 네가 체험해 보고 그 길이 내 길이다 해도 진짜 돈 많은 백수를 만들어 줄 돈이 없거든. 그래서 엄만, 내 아이가 책임질 수 없는 미래를 꿈꾸는데 일조할 수는 없어. 미안."
"엄마, 그럼 그냥 이번 방학 동안만 뒹굴뒹굴 돈 많은 백수 체험해 보면 안 돼?"
"그럼 이름을 바꿔야지. 돈 없는 백수 체험으로. 그런데 네가 해 보고 싶은 건 돈 많은 백수 체험이지 돈 없는 백수 체험이 아니지 않니?"
제주여서 다행이었다. 매일 아침 "당근 안녕"하는 제주여서. 매일 한 편씩 시를 읽는 제주여서. 그래서 내가 의연할 수 있었다. 아니 의연한 척할 수 있었다. 세상에 열두 살 입에서 <돈 많은 백수 체험>이라니. 아니 다 떠나서 너의 제주생활은 대부분 뒹굴뒹굴 아니었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내가 꼰대인 거니?
아직도 한밤중인 아이를 바라보며 어젯밤 이야기를 글로 기록해 둔다. 돈 많은 백수 체험이라니. 아이의 발상이 귀엽기도 걱정스럽기도 하다. 나 역시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생각에 제동을 걸어 준 것은 친하지도 멀지도 않은 회사 동료였다.
"얼마나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해요?"
십만 원 이상은 뒤에 붙은 동그라미 개수를 하나하나 세어가며 금액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 당연히 돈의 규모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당장 생각나는 대로 "1억?" 했다. 그는 이 여자 참 대책 없구나 하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자 그럼 1억이 생기면 뭘 하고 싶은데요?"
세계여행. 제주도에 집 사기. 아니 내 머리 위의 주택융자 일시상환. 부모님 집 리모델링...
그가 말했다. "세계여행이 1억으로 가능할 것 같아요. 뭐, 일단 가능하다고 칩시다. 여행 후 잔고 0이 된 후엔 돌아와서 뭐 먹고 뭐 하고 살 건데요? 집 한 채에 1억? 어디에 사고 싶은데요. 사고 싶은 동네 시세는 알고 하는 이야기예요? 주택융자가 얼만데요? 1억이면 일시상환이 가능하긴 해요?"
그날 나는 그 동료 덕분에 생기지도 않은 1억이란 돈이 가지는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럼 10억? 친구가 알려줬다.
"얘, 10이면 이 동네(강남) 괜찮은 오피스텔 하나도 못 사는 돈이다, 너." 10억도 안 되겠네 그럼 100억?
그때 깨달았다. 많은 돈을 가지고 싶다면 왜? 얼마나? 가지고 싶은 지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하는구나. 그날 이후 나는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부자가 되고 싶어요' 대신 왜 부자가 되고 싶은지, 얼마나 가져야 부자인 건지를 가끔 생각한다.
제주에서 지내며 아이가 좋아하는 소품샵과 내가 좋아하는 동네책방을 가끔 간다. 대형서점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책들을 만나면 고마웠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작고 앙증맞은 소품을 보면 또 누군가가 떠오른다. 떠오르는 사람들 중 누군가의 선물은 사고 누군가의 선물은 다음으로 미룰 때 내가 부자였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2인분의 식사는 양도 많지만 가격도 부담스러워 1인분만 테이크아웃해 와서 아이와 나눠먹을 때. 아이의 먹는 기세가 남달라 내 몫을 먹다가 멈추고 아이가 더 먹을지 말지 관찰할 때, 나는 내 주머니 사정이 더 넉넉했으면 한다. 그래도 돈 많은 백수는 사양한다.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는 돈 많은 백수라면야 생각해 볼 법 하지만, 그럼 이미 그는 백수가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