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지배했던 게임 이야기
어릴 적 처음 만지던 휴대용 동킹콩부터 재믹스를 지나 지금 플레이스테이션4까지...정말 많은 시간을 게임과 보내왔고 지금은 게임을 만드는 일을 즐겁게 하고 있다. 관련 업종에 있던 아니던 간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많은 추억을 만들었고, 또 만들어 가고 있다. 이 게임이라는 건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사람들을 매료하는 걸까? 이번 회에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도록 하자.
난 초등학교 때 일본에서 살았다.
당시 아버지는 갑자기 일본으로 발령을 받으셨는데, 급하게 가다 보니 국제학교 입학 대기가 길어져 일본인 학교로 그냥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전교의 유일한 외국인, 그것도 못 사는 나라에서 온 꾀죄죄한 녀석으로서 상당한 왕따(이지메)에 시달려야 했다.
만화에서만 보던 커튼말기도 당해봤으며, 나를 위해 만들어진 ‘마늘 냄새 나는 조센진 송’까지 (아직도 가사가 기억날 정도…). 일본어를 못했던 나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던 와중에 이 벽을 깰 수 있던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게임'이었다.
당시 전국을 휩쓸던 닌텐도의 ‘패밀리 컴퓨터(패미콤)’을 사주신 부모님 덕분에 조금씩 친구가 늘어났으며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게임팩도 덩달아 늘어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유행하는 게임은 안 놓치고 다 샀던지라 수십 개의 팩을 보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로운 팩을 샀을 때 빳빳한 종이곽을 열고 팩에 쌓인 비닐을 벗길 때의 두근거리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먼지를 제거한답시고 카트리지를 후후 부는 것은 올드 게이머라면 누구나 버릇처럼 하던 일인데, 새로 산 게임은 이 과정 없이 바로 꼽을 수 있다는 점이 묘한 쾌감을 주기도 했다.
또 슈퍼패미콤부터 단색으로 통일된 카트리지의 케이스도 패미콤 시절에는 마리오는 노란색, 록맨은 파란색 등 게임의 대표색로 되어 있어 서랍을 열었을 때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주었다.
겜덕후로 일본 학교에서 이름을 날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슈퍼패미콤, PC엔진, 게임보이, 플레이스테이션 등 안 거친 게임기가 없을 정도로 비디오 게임을 즐겼다. 급기야는 대학 졸업 후 게임 회사까지 입사 하게 됐다.
이만하면 내 인생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난 온라인 게임은 그렇게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물론 게임 회사를 다니면서 당시에 유행했던 것들은 다 해보긴 했지만 여가 시간에 스스로 찾아서 한 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비디오 게임은 아직도 밤새도록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디지털 다운로드보다는 국제전자센터나 테크노마트에 가서 직접 고르고 사서 가져오는 게 즐겁다. 패키지를 손에 직접 쥐고 표지를 보면서 ‘아, 과연 어떤 스토리일까, 그래픽은 끝내주겠지, 전작의 주인공들은 나오려나’ 상상하며, 돌아오는 길에 참지 못하고 설명서를 꺼내보는 나를 생각해보니 역시 그게 맞는 것 같다. 게임 회사들이 한때 중고 거래에 반대하면서 전면적인 디지털 다운로드로의 전향을 꿈꿨던 적이 있었지만 결국 포기했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 아닐까?
게임의 즐거움은 복합적이고 오묘하다. <매일매일 DS 두뇌 트레이닝>이나<WiiFit>처럼 교육이나 운동을 게임화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도 있고, <Grand Theft Auto>처럼 가상현실 속에서 마음껏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카톡 게임 같은 경우는 친구들과 경쟁만 붙여놔도 수만 원의 돈을 들여가며 열을 올리기도 한다.
<DS 두뇌 트레이닝>에서의 교육은 현실에서의 무겁고 딱딱한 교실이 아닌 따뜻하고 유머감각이 있고 똑똑한 선생님을 눈앞에 대령해준다. <언차티드>는 두렵게만 느껴지던 정글을 직접 뛰어다니고 디딤돌이 부서지는 아찔한 경험을 하게 해주며, <스타크래프트>나 <리그오브레전드>는 평소에는 친분을 과시하던 친구들과 마음 놓고 치고받고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게 바로 게임의 마력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해보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들, 꿈꿔본 것들, 너무 현실적이지만 조금은 다른 것들(GTA같은 게임들)을 실현 시켜주는 도구이다.
하지만 게임의 매력은 이게 다 아니다.
현실을 생각해보라. 못생기고 공부 못하고 돈 없는 우리들이 잘생긴 연예인이나 재벌 2세처럼 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게임에선 가능하다. 게임의 룰은 항상 공정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도 열심히 경험치를 쌓고 노력하면 좋은 장비를 얻을 수 있고, 결국에는 최고점에 도달할 수 있다.
현실에선 운이 나빠 실패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게임에서 운이 작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강화나 아이템 뽑기를 할 때 빼고.... 정해진 루트를 따라 최선의 방법으로 집중하면 대부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경쟁하려고 하고 더 올라가려고 하고 더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게 게임의 얄미운 점이고, 또 즐거운 점이다.
나에게 있어 게임 팩 또는 CD라는 것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마법서와도 같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게임을 실행하면 그 안에는 우주여행도 있고 지하 세계도 있다. 그 안에서 내가 영웅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내가 실물 비디오 게임을 고집하는 건 어쩌면 이런 곳에 여행을 갔다 온 증거물, 혹은 기념 티켓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가끔 모아놓은 게임들을 보면 정말로 여행 사진을 보듯이 뿌듯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이번 장에서는 온라인이나 모바일 게임보다는 비디오 게임 또는 고전 PC 게임을 중심으로 다루려고자 하니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이야기나 <리니지>이야기를 기대하신 분은 아쉽더라도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게임을 수집한다고 했을 때 수십 개의 게임을 다운로드 한 것 보다는 아무래도 물리적 게임을 소장하는 것이 더 '수집'으로서 와닿는다. 게임 마니아라 좀 주관적일지 모르겠지만, 게임 수집은 다른 수집 취미와는 다른 고유의 재미가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화는 길어야 3시간을 투자하는 매체임에 반해 게임은 최소한 10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RPG 게임 같은 경우는 최장 50시간까지도 투자해야 한다. 이는 같은 상품을 수십 번은 만져봤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 같은 경우, 가슴 뛰게 사랑했던 <파이널판타지7>이나 <메탈기어솔리드> 는 정말 CD가 닳도록 기기에 올려봤다. <디아블로2> 패키지만 봐도 본인이 쏟아 부었던 수십 수백 시간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들인 이상 그 상품에 대한 애착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결국 수집은 추억을 모으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쓴 만큼 수집의 만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다시 영화랑 비교하자면, 영화는 상당한 리바이벌이 이루어지는 분야다. 고전 명작이라면 반드시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주기적으로 틀어주고 있을 것이며 여기저기에서 떨이로 영화 DVD를 싸게 팔고 있는 것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영화 DVD 수집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하지만 게임은 그 기계, 그 CD를 거치지 않으면 플레이가 불가능하다. 물론 요새는 버츄얼 콘솔이라고 해서 다운로드 형태로 고전 게임을 즐길 수 있기도 하고 모바일 등으로 이식되는 사례도 적지 않지만 이렇게 재판매되는 게임은 일부일 뿐이다.
나머지 게임은 여전히 어떤 루트로든 패키지를 구해서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치하게도 이런 게임을 구했을 때 정말 비밀이 가득한 마법서를 구한 것처럼 기쁘다. 낡은 게임기의 전원을 켜고 오랜만에 카트리지를 딸깍 넣을 때의 오묘한 ‘하악하악함’은 정말 살 떨리게 매력적이다.
게임은 어느 분야보다 저장 매체가 많이 바뀌어 왔다. 아주 최초의 플로피디스크부터 플라스틱 카트리지, CD, DVD, 현재의 블루레이까지. 이뿐 아니라 휴대용 기기로 넘어가면 UMD와 카드형 카트리지까지 아주 다양한 형태의 저장매체를 이용해왔다.
제주도에 있는 넥슨 컴퓨터 박물관에 가보면 이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여기서 패미콤의 추가 시스템이었던 ‘패밀리디스크’의 플로피 디스크를 오랜만에 보고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그 아담하면서도 똑 부러지게 생긴 노란색 디스크만 봐도 그 게임기를 구동하던 기억, 게임하던 기억 등이 다 되살아났다. 그건 아마 이 매체가 그 게임기 자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아마 VHS 테이프 자체만 보고 깊은 추억에 잠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우리에게 ‘젖소부인 바람났네’부터 ‘EBS 영어 강좌’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수없이 다양한 기기에서 재생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때 간지의 상징 MD(Mini Disk)를 보면 조금 느낌이 다르다. MD는 소니에서 제공한 전용 플레이어에서 밖에 돌릴 수 없고, 담기는 내용이 대부분 음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MD라는 매체를 보면서 당시 느꼈던 약간의 우월감, MD 플레이어를 켤 때의 두근거림, 또 거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들을 오롯이 추억할 수 있다.
난 게임의 다양한 매체들이 그런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회색 슈퍼패미콤 카트리지, 거기에 대항했던 검정색 메가드라이브(슈퍼알라딘보이) 카트리지, 뒷판이 검었던 플레이스테이션의 CD, 또 엑스박스의 초록색 CD 케이스까지. 시대와 주관 업체의 고집이 담긴 그 형태만 봐도 관련된 많은 추억들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게임을 수집하면서 이 점이 가장 즐거웠다. 만약 전부 똑같이 생긴 CD나 카세트 테이프였다면 아무래도 감흥은 조금 떨어지지 않았을까?
이처럼 다양한 이유로 게임 수집은 꽤 재밌는 취미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다소 이들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다. ‘게임돌' 등의 고전 게임팩 판매 사이트도 있긴 하나 사실 제일 속편한건 일본을 직접 가는 것이다.
아마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도쿄의 아키하바라나 오사카의 덴덴타운을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양손이 쇼핑백으로 가득한 기적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카히바라와 덴덴타운 등에는 패미콤부터 최신 게임기까지 수많은 게임기와 관련 소프트웨어를 정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매장들이 많다. 가격대도 그렇게 높지 않다.
혹시 옛날 게임이라고 프리미엄 붙여서 팔진 않을까 했었지만, 웬만하면 2000엔 이하로 구할 수 있다. 상태가 약간 좋지 않은 경우는 100~200엔에도 구할 수 있는 팩들이 아주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만약 게임을 직접 하는 것보다 정품 소장에만 의의를 두시는 분이라면 이렇게 대량으로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게임기 역시 의외로(?) 저렴한 5000~7000엔 선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사실 난 게임 콜렉팅 쪽으로는 한이 많은 사람이다.
부모님께서 뭔가를 쌓아놓고 수집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이사를 갈 때마다 게임과 관련 잡지들(일본 잡지가 100권 이상 있었다)이 뭉텅이로 사라졌고 결과적으로 군대와 해외 생활까지 거치면서 내 손에 남은 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콜렉팅에 대한 장기적 안목이 없었던 나는 그 당시에는 ‘다 깬 게임들이니 할 수 없지. 그래도 혹시 팔았으면 돈이 됐을 텐데. 아깝다’ 정도만 생각하고 그 소중한 추억들을 흘려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땅을 치고 벽을 칠 일이다.
여담이지만 사업을 하며 개인 콜렉션의 온라인 전시 서비스를 만든 이유도 소중한 콜렉션을 이렇게 어영부영 날려 보내지 말고 최소한 가상의 저장소에라도 보관해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살다보면 부모님이 버리기도 하고 자식이 장난치다 깨기도 하고 별의별 일이 있기 마련이니까.
난 나중에 창고를 임대해서라도 내 자식이 갖고 놀던 건 다 모아 놓을 것이다.
스토리나 사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을 담을 수 있는 건 바로 그 ‘물건’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리정돈 논리에 못 이겨 놓쳐버린 수많은 추억의 조각들을 언젠가 돈을 벌면 하나둘 찾아오고 싶다. 특히 내가 인생의 많은 시간을 들였던 ‘게임’은 다시 꼭 수집하고 싶은 항목이다.
굳이 다시 플레이하진 않더라도 집에 돌아와 벽에 멋지게 장식된 게임기와 카트리지들을 보면 너무 흐뭇할 것 같다. 혹시 모르지, 나중에 은퇴하면 할 시간이 좀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도 아름다울 것 같다. 너무 덕스러운 생각인가?
(2부 "추억의 게임, 다시 해도 좋을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