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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Oct 15. 2023

흥미와 몰입을 위한 장르?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나는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단편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현대문학에 있어 미스터리, 호러, SF 등 장르의 분화를 촉진하는데 단편이 큰 기여를 했다는 어려운 말을 굳이 들먹일 필요는 없으리라.


이쯤에서 읽기와 관련하여 우리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자. 첫 책은 무조건 그림책이다. 어차피 글씨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양육자가 읽어준다 하더라도 장시간 집중하지도 못한다. 이후 아이가 '책 읽어줘!'하는 요구를 할 수 있게 되면 적은 글밥의 그림책부터 차차 집에 들인다. 이후 글밥이 점점 늘게 되고 시일이 지나면 그림이 없는, 글씨로만 가득한 책으로 간다.


글씨만 있는 책 안에서도 물론 단계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아이 본인이 즐기는 장르와 내용으로 읽으면 되나, 창작 동화 같은 것에서 고전 문학으로 갈 때는 그간의 과정과 다르게 한꺼번에 몇 계단을 점프하는 격이다. 이 단계를 어떻게 넘느냐가 추후 책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일종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관건인데 대개는 길이가 짧은 이야기, 그러니까 단편부터 시작한다. 이 시절에 노출시켜주는 고전 단편들 중 대표적인 것들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모두 이와 유사한 단계를 지나쳐왔다. 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단편을 거쳐 장편에 닿았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단편은 어려워서..' 같은 생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는 단편 안봤는데요? 성인이 되고나서 장편 판타지부터 시작했는데요?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후훗, 과연 그럴까? <공포 특급>을 기억하실런지 모르겠다. 꼭 <공포 특급>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그 시절에 우리가 죽고 못 살았던 무서운 이야기, 귀신 이야기는 전부 단편이다. 창 밖에 어떤 할머니가 찾아와 길을 묻길래 알려줬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집은 5층이었다는 썰, 머리를 감으면서 내 위에 매달린 귀신머리까지 같이 감기고 있었다던 썰, 절대로 이 인형과 단 둘이 있지마세요- 라고 했던 저주받은 삐에로 인형 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단편의 형태를 따른다. 장면은 하나 내지 두 개, 압도적이고 충격적인 결말(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서스펜스급 반전!)까지. 만약 귀신 이야기가 장편이 된다면 이건 반드시 퇴마록이 되어야 한다. 300페이지 내내 귀신에게 시달리기만 하더니 심지어 퇴치도 하지않고 끝난다? 이 정도면 정서적 학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너무 옛날 얘기 하는거 아니냐고, 대체 몇 살이냐는 질문이 들어올 수도 있겠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공포 문학들은 여전히 단편의 형식으로 많이들 나온다. 많은 이들이 '어렸을 적엔 귀신이 그렇게나 무섭더니 어른이 되고 난 지금은 사람이 더 무섭더라'고들 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귀신도 무섭고 사람도 무섭다. 요즘의 공포 문학은 귀신보다는 사람의 무서움에 더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고 개인적으로 이건 호러보다는 스릴러나 범죄 소설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쉬움이 있긴 하나 그렇다고해서 한국 공포 문학의 명맥이 아예 끊어진 것은 아니다. 일단 한국의 도서 시장 자체가 그닥 크지 않은데 그 와중에 공포 문학은 파이가 더 작기도 하거니와,  ‘애들에게 유해하다’는 잣대 등이 큰 걸림돌이다보니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온라인 플랫폼에 게재되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스압은 곧 스킵'이기 때문에 단편으로 계속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들은 싼티나는 B급 감성이라고, 책을 읽어도 무슨 그런 책을 굳이 찾아 읽냐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해력을 기르는 책 읽기의 기본은 흥미와 몰입이다. 흥미를 갖고 몰입하지 못하면 ‘문해’가 아니라 ‘글자 읽기’에 그치고 말게 될 수 있다. 그런데 흥미와 몰입은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내가 직접 선택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읽고 싶고 내 수준에 맞아야 한다. 책을 읽음으로서 반드시 교훈을 얻거나 인생에 있어 큰 깨달음을 얻어야한다거나, 지식을 흡수해야한다거나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권장도서” 위주로 읽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책을 마음 편히 고르지도, 읽지도, 즐기지도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반해 무서운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몰입이 쉽고 흥미롭다.


말 나온김에 공포 단편과 관련하여 소개하고 싶은 저자가 있다. 우루과이의 오라시오 키로가다. 한국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차지하는 위치가 아직까지는 크지 않기 때문에 다소 생소할 수 있겠으나 오라시오 키로가는 기 드 모파상, 에드가 엘런 포, 안톤 체호프와 함께 근대 단편 소설의 대가로 통하는 인물이다. <판의 미로>와 <세이프 오브 워터>, <퍼시픽 림> 등의 감독이자 블랙 판타지에 있어서만큼은 천재로 불리는 '기예르모 델 토로'가 사랑하는 작가도 잘 알려져있다.


키로가의 단편들은 삶과 죽음 사이 그 어딘가 즈음을 휘저으며 독자를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은 해리포터처럼 판타지스러운 마법 세계보다는 생경한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 그 어디 즈음.. 하는 쪽에 더 가깝다. 나는 누군가의 글과 삶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키로가 역시 그렇다. 키로가의 삶은 저승사자가 집요하게 따라붙은 수준이다. 이런 삶을 사는 이에게 글이란, 창작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키로가의 친부 : 사냥을 나갔다가 오발사고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즉사

키로가의 계부 :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된 후 키로가가 보는 앞에서 엽총 자살

키로가의 누나와 형 : 장티푸스로 요절

키로가의 아내 : 음독 자살

키로가의 친구 : 키로가가 친구의 총을 살펴보던 중 키로가의 오발사고로 사망

키로가 본인 : 위암 투병 중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

키로가의 장녀와 장남 : 키로가 사망 후, 둘 다 자살


죽음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서일까, 키로가가 작품 속에서 그린 죽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사실에 가깝다. 태풍과 홍수, 가뭄과 폭염, 그로 인해 수반되는 일사병과 열사병, 외로움과 우울증, 탐욕, 독사와 말벌, 진드기와 불개미 등 그의 단편 속에서 죽음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무른다. 이는 어쩔 도리 없이 키로가의 진짜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들이 울적하다거나 우울하지는 않다. 읽는 사람을 진 빠지게 만드는 스타일도 아니다. 괴기스러운 면은 좀 있지만! 영화에 비유하자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급으로 나름의 박진감이 있다.


이런 류의 서늘한 이야기들은 후텁치근한 여름밤의 더위를 잠시 잊게 해줌과 동시에 잠시나마 현실 도피를 가능하게 해주기도 한다. ‘풍덩’하고 완전히 빠져들기 쉬운 이야기들이다. 다시금 강조하자면 이 '풍덩', 그러니까 글에 완전히 몰입하는 경험은 읽는 생활의 지속에 있어 그 글의 장르가 무엇이냐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게 되면 그 날 밤 꿈자리가 무척 사나울 수 있으니 이 부분만 주의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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