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예 Oct 22. 2023

우리가 잃어버린 능력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선별하는 능력, 그리고 알고리즘의 늪

누군가는 초-중-고를 거치며 우리가 학교에서 받는 문학 교육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최소한 언어 영역의 '지문'보다는 길 것이니, 지문으로 만나는 작품은 무조건 어떤 작품의 일부분일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특정 단락만 떼어내어 특정한 문장과 단어에 밑줄을 긋고 그것에 어떤 상징이 숨겨져있는지를 암기시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작가 본인이 본인의 작품을 지문으로 활용한 모의고사 문제를 풀어봤는데 틀리고 말았다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도 실재한다. 난 이런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쓴 게 아니라고! 니들이 뭔데 내 의도를 결정해! 하는 항변조차 먹히지 않았다는 후문까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교육 방식이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정된 시간 내 여러 분야를 다채롭게 배워야하는 정규 교육과정 내에서 관심사도 능력치도 제각각인 모든 학생들에게 모든 문학 작품을 원문으로 읽히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특정한 문장과 단어에 밑줄을 긋는 행위 또한 그 작품이 발표된 사회적 맥락, 작품 내적인 논리, 저자의 일생과 사상 등을 고려해보면서, '어떤 문장과 단어에는 눈에 보이는 단면적인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이 세상을 보는 눈은 절대 같을 수 없다. 말장난 같을 수 있지만 바로 이 '해석'이 바로 문해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문학에 흥미가 있는 학생이라면 짤막한 일부 '지문'으로 작품의 맛을 본 일을 계기 삼아 원문을 찾아 완독을 할 수도 있고, 이후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여 빈약하나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갈 수도 있다. 첫 만남은 수동적이었을지 몰라도 이후 이어지는 활동은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능동적으로 해낼 수 있다. '스스로 책을 찾아 읽는 경험'이 있어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가 시작될 수 있는데 이 '스스로 책을 찾아 읽는 경험'의 시작을 학교에서의 문학 과목이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 과정은 바람직하다, 적어도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하는 류의 주장을 새삼스럽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단편(장편은 저자가 아주 친절하게 세계의 상당 부분을 제공해주기에, 나만의 세계를 구축할 공백이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가 많다)을 잘 읽는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이고, 어쩌면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종종 한다. 그 기초를 정규 문학 과목에서 어느 정도는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시 이런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 부분 숨겨지고 응축된 문학 작품을 읽는 일은 원래 어렵다. 자극적이고 직관적인 즐거움, 빠른 전개, 그리고 시각적/청각적 정보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책읽기는 더더욱 가까이하기 어려운 행위가 되었지만 그만큼 완독을 하고 뭔가를 느꼈을 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더욱 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어렵고 난해한 이야기를 읽는 것만이 의미있는 독서처럼 보이는 경향도 있다. 독서 또한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된 세상을 살며,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끔 어지럽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내가 읽은 것을 내보이고 관련해서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한다는 것이다. 그건 내 수준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꾸 내보이고 자꾸 이야기해야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가 비로소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문해력의 성장을 위해서도 이 일들은 꼭 필요하다. 문해력을 키우려면 사색과 관찰이 필수인데 그 전에 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차분한 마음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행간을 읽고 분위기를 파악한 후 추론과 상상까지 이어가야 하는데 일단 내가 흔들거리고 있다면 뭔가에 집중해서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부터가 힘들어질 수 밖에 없어서다.


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의 시작점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취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가고 있는게 현실인데 그건 우리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핫한 것, 요즘 뜨는 것,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기 쉬운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점에는 알고리즘이 있다.


알고리즘의 늪에 한번 빠지면 에지간 해서는 빠져나오기 어렵다.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어쩜 그리 귀신같이 찾아주는지 남편보다 백 번 낫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조차도 잘 모르는 와중에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것들은 하나같이 찰떡같다. 내 뇌 속에 도청장치를 심었나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즈음 한편으론 무서워진다. 내가 정말로 좋아해서 이런 것들이 나에게 추천되는게 아니라 이런 것들이 자꾸 나에게 보여지니까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한다고 믿게 된 것은 아닌가, 나라는 인간의 취향이란 얼마나 빈약하고 쉽게 조종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것들 위주로 선택하고 소비할 경우 크게 '실패'를 하진 않겠지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기회는 전격 차단될 수 밖에 없다. 같은 생각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고 같은 의견만 주고 받으며 편식하다보면 사고의 폭은 점점 더 좁아진다. 정보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앞에 주어진 바다는 세숫대야만큼의 분량도 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혹은 좋아한다고 믿는 것과 비스무리한 것들만으로 가득찬 좁디 좁은 세상에 살며 세상은 다 이런 거라고 믿게될 지도, (만약 아이가 있다면) 그 위험한 믿음이 내 아이에게까지 대물림될지도 모른다. 나는 물론이고 내 아이까지 echoborg(생각과 말과 행동이 AI에 의해 결정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책은 처음인데 굉장히 신선하네?', '아, 이 작가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는 류의 성공과 실패를 반복해야만 내 세계가 넓어질 수 있다. 귀찮고 성가시고 피곤하고 수고스러운 일이다. 편협한 세계를 빠져나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때문에 이 과정을 단시간 내 해치워야하는 일종의 과업이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과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는 재미로 생각해야 책읽기를 지치지 않고 오래 지속할 수 있다. 인생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을 닮은데다가, 취향이란 살다보면 달라지기도 하는지라 이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고, 또 끝나지 않아야 함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시금 말하지만 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신 커피가 좋아' 와 '나는 레몬 같은 느낌의 신 커피는 별로이고 풋사과 향이 은근하게 나는 신 커피가 좋아'는 천지차이다. 이 쪽도 마찬가지다. 책을 좋아해, 보다는 소설을 좋아해가 낫고, 소설을 좋아해보다는 단편을 좋아해 가 낫고, 단편을 좋아해보다는 호러 단편을 좋아해가 나으며, 호러 단편을 좋아해 보다는 포 같은 스타일의 호러보단 보니것 같은 스타일의 호러를 좋아해가 더 낫다. 내 취향을 좀 더 확고히 찾아가기 위해서 일단은 무조건 많이 읽어보자. 읽어보고 좋고 싫음을 판단해보자. 저 정도 발언을 할 수 있다는건 장편도 읽어봤고 단편도 읽어봤고 호러도 읽어봤고 스릴러도 읽어봤고 로맨스도 읽어봤고 포도 읽어봤고 보니것도 읽어봤단 소리다. 좀 더 구체화해서 왜 좋고 왜 싫은지도 생각해서 몇 개의 문장으로 만들어볼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오늘도 나는 세상에 읽을 책이 많고 그 책들로 내 세계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