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코보, <붉은 누에고치>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 했다.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이 우리는 적재적소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고 사는 일에 이미 익숙하다. 이를 전문 용어로는 '페르소나'라고 한다. 하지만 나의 본 모습을 모른 채로 이를 사회적인 페르소나와 동일시하며 살다보면 어느 새 가면 자체가 내 얼굴이 되어 벗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가면 속 맨 얼굴 정말 중요하지, 하지만 그 가면 자체가 나라면?"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칼 융은 그런 식으로 살면 그 사람의 내면은 끝내 피폐해질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당연한 소리다.
문학을 읽는 일은 피폐해질 위험 없이 여러 개의 가면을 써보는 일이기도하다. 책을 읽으며 나는 때로는 19세기 프랑스의 몰락한 중년 귀족이 되었다가 정글 속 흑표범이 되기도 하고 알코올과 마약에 찌든 미국의 싱글맘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가면'이라고 하면 아베 코보의 <타인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실험실에서의 사고로 얼굴을 잃게 된 한 남자가 타인의 얼굴을 본 뜬 가면을 만들어 쓰고 타인으로 변신, 자신의 부인을 유혹한다. 부인이 유혹에 넘어가자 남자는 배신감에 부인을 살해하기로 결심하지만 부인은 처음부터 가면 속 남자가 남편이었음을 알고 있었다고 밝히고 그를 떠난다는게 큰 줄기. 아베 코보는 사실 국내에선 <타인의 얼굴>보다는 <모래의 여자>로 더 잘 알려진 작가이고 대개 장편 위주로 소개되어 있는데 단편집도 있기는 있다. 현재는 절판이 되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단편과 장편은 단순히 그 길이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장편은 이야기를, 단편은 하나의 인상이나 장면을 담는다. 중편은 말 그대로 중간. 중편은 때로는 단편을 늘여놓은 것 같고 때로는 장편을 압축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아베 코보의 단편들은 길이로만 본다면 중편 정도 되겠지만 이런 기준으로 나눈다면 일부는 장편에, 일부는 단편에 가까운데 그 중에서 나는 단편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더 좋아한다. 1950년대에 쓰였다는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재기 넘치고 신선한 것이 특징이고, 지금 단편 영화나 웹 드라마 등으로 영상화를 한다고 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을 만큼 시대를 앞선 느낌이 있다. 천재란 이건 거구나 싶어 읽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아베 코보의 이야기들은 다소 앞 뒤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투명인간이 되어서 그림자가 사라진게 아니라 그림자를 분실했기 때문에 본체도 투명인간이 되었다는 식이다. 그 와중에 그림자는 너구리가 물어갔다는 설정이니 독자들은 어리둥절해진다. 투명인간이 된 주인공은 이후 너구리를 따라 천계와 인간계를 연결하는 바벨탑으로 간다.
이른바 팩트의 시대다.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팩트를 들이부으려면 그를 뒷받침할 근거를 모으는 일이 당연히 수반되어야하지만 사실 설득에는 팩트 폭격이라는 방법만 있는게 아니다. 가짜 뉴스가 판치는 시대에 새삼스레 팩트의 중요성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팩트는 중요하다. 그렇지만 팩트, 그러니까 '사실'보다는 '진실' 속에 우리 인생이 있다. 고민과 성찰이 기반하는 인간다움.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좇는데 급급하지만 우리의 인간다움은 사실보다는 진실에 더 닿아있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문학의 가치는 한 번 더 빛을 발한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 안에서, 비록 그것이 황당무계한 것이라 할지라도 독자는 그 세계 안에 있는 동안만큼은 그저 이리저리 따르며 작가가 말하고자 한 삶의 진실을 찾으면 된다. 나는 궁극적인 문해력은 이 지점까지 가 닿을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머리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건 글이 아니라 글자를 읽은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 친절하게 떠먹여주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발견하려 애쓸 때 문해력은 한뼘 더 성장한다.
누군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 종이책을 읽는 일은 너무나 구닥다리스러운 일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필요한 정보는 전부 온라인에 있고, 대부분은 친절하게 동영상이나 이미지로 만들어져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가장 많이 마주하는 것은 글자다. 16부작짜리 드라마를 1시간짜리 요약본으로 만들고 그걸 또 10초짜리 쇼츠로 만들어 보는 세상이지만 그런 유튜브 영상에도, 쇼츠에도, 짤에도 모두 글자로 된 자막이 달린다.
OECD가 21년 5월 발표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만 15세 학생들은 인터넷 정보에서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능력’이 가장 낮은 수준으로 조사됐다. OECD 평균 식별률은 47.4%인데 한국의 학생들의 식별률은 25.6%에 그쳤다. 인터넷 정보에서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능력’은, 가짜 뉴스를 마주했을 때 그것이 사실인지 검증하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가?에 관한 얘기로, 또 다른 말로는 '디지털 문해력'이라 할 수 있다. 온라인 상에 넘쳐나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정보를 나만의 기준대로 걸러내지 못한다면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일도 불가능해진다. 정보의 진위에 대한 판단 없이 비판적 사고를 취할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기초적인 디지털 문해력은 우선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후 사실과 의견을 식별할 수 있다. 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사실에서 진실을 길어올리는 영역까지를 커버한다.
아베 코보의 또 다른 단편인 <붉은 누에고치> 속 '나'는 집이 없다. 내 집이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목을 맬 수도 없다. 내 구두 속에서 명주실이 한 가닥 나온다. 죽 잡아당겨보니 계속 나오는데 점점 발이 사라지고 다리가 사라진다. 나는 마치 올이 나간 스웨터처럼 계속 풀려나가 하나의 실타래가 되어버리고 그 실타래는 텅 빈 누에고치의 형상을 띠게 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내 집이 생겼지만 이제 그 집으로 돌아갈 내가 없다.
이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사실'은 '나는 집이 없다'는 것 하나 뿐이다. 나머지는 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 말도 안되는 소리 속에 진실이 있다. 집이란 무엇인지, 살기 위해 집이 필요한게 아니라 집을 위해 살아가는 현실은 21세기에도 여전한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내가 곧 집이 되었을 때 그 집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지 등이 코보가 묻고 싶었던, 삶의 진실에 조금 더 가닿도록 하는 질문들일 것이다. 읽는 행위는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볼 수 있는 힘 또한 길러준다. 사실의 힘이 너무 강해 때로는 진실이 가려지기도 한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