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니것, <우주의 왕과 여왕>, <제니>
다독이 중요한가, 정독이 중요한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대개는 (망설이며) "정독..?" 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많이 읽는 것보다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으니 정독이 다독보다 더 중요할 것도 같다. 단, 그것은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을 때'라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한 얘기다.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정독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단 뭐라도 읽어야하니 다독일까? 정답은 다독도 정독도 아니다. 정답은 책에 대해 긍정적인 경험과 감정을 갖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 책을 좋아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다독도 절로 되고 정독도 절로 된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일이 가능하려면 책은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 재미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한 것이라는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야 한다.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혹은 지식을 쌓기 위해 노잼이어도 꾸역꾸역 읽어야지 별수있나..?가 아니라 말 그대로 너무 재미있고 너무 흥미로워서 저절로 책을 펼치게 되어야 한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안달이 나야하고 읽다가 전율이 슥- 밀고 올라오며 소름이 쫙- 돋아야 한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꾸만 권하는 이유다. 그래서 앞서 공포 단편을 권하기도 했다.
유사한 맥락에서 이번에는 커트 보니것의 단편을 소개하고 싶다. 보니것의 단편들은 한 방이 있는 반전과 깔끔한 결말이 매력적이다. 장황하지 않고 시원스럽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을 콕 찌르는 맛이 있다. 하지만 보니것의 단편을 읽기 초심자들에게 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작가의 본의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으로, 바꿔 말해 읽기가 쉬워서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직접적인 대사로 주요 메세지들이 전해지기에 독자 입장에서 (문해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제니>의 천재 공학자 조지는 아내 낸시를 본 따 만든 기계 여인(정확히는 냉장고)의 '완벽함'에 빠져 '불완전'한 진짜 낸시를 버린다. 낸시가 죽음을 앞두고 남긴 쪽지에는 '한때 신이 당신에게 사랑하라고 주셨던 불완전한 사람을 봐달라는, 다시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달라'는 내용이 대놓고 적혀있다. <100달러짜리 키스>에는 '이 세상의 문제가 뭐냐'는 수사관의 질문에 "모두 사진에만 관심을 가지고, 피사체 자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직설적인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보니것의 단편에서는 세상사 어이없고 황당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난다. 하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냥 그렇게 막이 내리지는 않는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안에서 뭔가를 배우고 다음 단계로 한 발을 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 있어 누군가는 강제 교훈을 주려는 거냐며 유치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그런 유치함은 보니것의 이야기들 기저에 깔려있는 야무지고 기발한 컨셉, 그리고 따스함을 결코 앞서지 못한다. 비난하고 조소하고 조롱하고 혐오하는 일은 언제나 쉽다. 여기까지가 블랙 코미디의 영역이라면 보니것은 여기서 언제나 한발 더 나아간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더 나아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인데 보니것의 작품에는 분명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도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보니것의 단편 중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는 <우주의 왕과 여왕>이라는 작품이다. 부잣집 엄친아와 엄친딸인 헨리와 앤은 어느 날 밤 화려한 모습으로 공원을 가로지르다 기괴한 발명가 카핀스키와 마주친다. 카핀스키는 대뜸 그들에게 자기 집으로 함께 가서, 죽어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 달라고 부탁한다. ‘우주의 왕과 여왕’ 같은 모습의 두 사람이 아들 카핀스키의 발명품에 관심이 있고 심지어 구매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머니가 편히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이유에서였다. 순진한 헨리와 앤은 카핀스키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 싶은 카핀스키의 집으로 간다. 그들의 연극이 성공을 거두려는 찰나, 경찰이 들이닥쳐 카핀스키를 체포하고 카핀스키의 어머니는 그 모습에 너무 놀라 즉사하고 만다.
보통의 단편이라면 여기에서 ‘헐’하고 끝나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보니것이 전하고픈 이야기의 진정한 시작은 여기부터다. 온실 속에서 따뜻하고 편안하게 자라온 헨리와 앤은 카핀스키로 인해 온실 밖의 모습을 강렬하게 마주했고 이후 그들의 세상은 달라진다. 더불어 카핀스키의 세상 또한 달라진다. 세 사람은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각자의 앞에 놓인 진짜 인생을 보게 된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나서 "참 재미있었다" 이상이 되려면 내 생각을 조금씩 덧붙여보는 경험도 필요하다. '내 생각'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나만의 창의적인 의견'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전에 겪었던 사건, 했었던 생각, 혹은 이전에 읽었던 다른 책의 내용이나 실제 세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연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뭐가 됐든 다른 기억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읽은 내용을 재료 삼아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말로든 글로든 표현할 수 있어야 진짜 내 것이 되었다고, 진짜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읽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이 세 과정이 하나의 사이클을 이루고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문해력'이 최종적으로 가 닿아야하는 지점이다. 문해력은 어쩌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문해력을 키우고자 하는 이유, 그것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들, 이를 테면 좋은 성적을 받거나, 일을 똑부러지게 해내거나, 타인과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들은 모두 '표현'의 영역에 닿아있다.
나는 <제니>를 읽고는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Her>를 연상했다. 그와 더불어, AI와 6주간 채팅을 하던 벨기에 남성이 AI로부터 유해한 영향을 받아 결국 자살을 택했다는 기사를 몇 달 전에 본 일도 떠올랐다. <우주의 왕과 여왕>을 읽고서는 나의 지난 날과 지금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날의 나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무기로 삼은 시니컬한 사람들, 혹은 비관론자들이 멋져보였다. 보니것스러운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라고만 생각했다. 바보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방구석에서 남들을 비웃으며 그저 본인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은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나는 오늘도 책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면서, 괜찮은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가 꽤나 괜찮은 것이며 심지어 실현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