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 <회색 눈사람>
사실 문해력은 글씨를 깨치고 적절한 읽기를 지속하면 많은 부분에 있어 저절로 따라오는 능력이었지만 적절한 읽기를 지속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진 요즘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문해력이 새삼스럽게 화두가 된 이유다.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읽는 행위'에 대한 기초부터 다시 정립해야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 한글의 강점이다보니 '읽는 행위' 자체를 새삼스럽게 또 배워야한다는 개념 자체가 어색한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한글의 영역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해력은 그보다 상위 단계의 능력이다. 일단 글자를 읽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은 활성화되는 뇌의 물리적인 부위부터 다르다. 글자를 읽는다는 것이 '시각 활동'이라면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자를 읽는 것은 기본이고, 이후 그 의미와 맥락을 파악해서 내용을 이해하는 '인지 활동'이다. 즉, 글을 읽기 위해서는 뇌가 인지 활동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전두엽이 활성화되어야 이 일이 가능하다. 필요할 때 전전두엽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잘 읽을 수 있지만 이 일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읽는 일이 어렵다고 한다. 글자를 읽는 데에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려 전전두엽이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뇌가 탈진한다고 보면 된다.
전전두엽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우선 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집중력은 체력에 기반한다. 공부 역시도 엉덩이로 하는 거라고 진작부터 어른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체력이 부족하면 지구력이 떨어지고 지구력이 떨어지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앉아있는 것 자체가 괴롭고 힘든데 눈 앞의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다는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을 잘 읽으려면 우선 체력을 올려야하니 당장 운동을 시작하세요! 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루한 체력으로도 글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소리내어 읽기, 즉 낭독이다. 애들도 아니고 남사시럽게 뭘 소리를 내서 읽냐 싶을 수 있지만 소리내어 읽는 방법은 잘 읽지 못하는 성인에게도 아주 유용하다.
뭔가를 읽는 일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 글을 눈으로만 읽다 보면 글자를 중간중간 빼고 읽기 쉽다. 문장 혹은 문단 하나를 통채로 건너뛰는 일도 은근 자주 발생한다. 소리를 내어 한자 한자 읽으면 이런 부분을 상당 부분 교정할 수 있다. 낭독은 눈으로 글을 보면서 입으로는 소리를 내고 귀로는 내가 발성하는 소리를 듣는, 3박자가 앙상블을 이루는 감각 활동이다. 내 눈과 입과 귀를 바삐 놀리는 것 만으로도 잡 생각이나 방해가 될 기타 감각 자극이 들어올 기회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여러 부분을 활용한 경험은 실제로 기억에도 더 오래 남는다. 발음에 신경쓰며 또박또박 읽는 것이 가장 좋긴 하지만 영 민망하다면 혼자 중얼중얼하는 정도로 시작해도 괜찮다. 중얼중얼도 아예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데 기나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한다는 것은 무척 힘에 부치는 일이라 낭독에도 역시 단편이 좋고, 기왕 소리를 내어 집중해서 읽을 거라면 단편 중에서도 조금은 치밀한 구성의 이야기가 좋을 것 같다. 슬렁슬렁 읽어도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그런 이야기보다는, 모든 것이 정교하게 계산되어 놓여있어 하나를 놓치는 순간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되는 이야기를 읽을 때 낭독을 통한 집중의 가치는 배가 된다.
이런 류의 작품들로는 최윤 작가의 작품들을 후보에 올리고 싶다. 치밀하게 계산된 단어와 그 단어들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끼워 맞춰진 묘사를 부품이라고 본다면 최윤 작가의 작품들은 그런 부품들이 정교하게 조합되어 이야기 전체를 이루는 스타일이다. 덕분에 스펙타클한 사건이나 반전 없이도 이야기 전체에 긴장감이 흐르는데, 자극적인 재료들로 버무려 상투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을 준다. 허투루 쓰인 단어, 문장 같은 것이 일절 없어서 굉장히 신경써서 읽어야 하는 글이라 짧은 이야기임에도 헐레벌떡 읽어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쉽게 쓰이고 쉽게 읽히다 못해 쉽게 잊혀지는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이런 글은 어쩌면 구닥다리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런 엄격한 글을 읽는 연습은 필수적이다. 내 입맛에 맞는 헐렁한 글만 평생 읽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고 문장 구조나 단어가 유달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휘릭 읽고 넘어갈 때보다 꼭꼭 눌러 소리내어 읽을 때 그 여운이 더 길다는 것이다. 담백하고 담담한데 쓸쓸한 문장들을 소리내어 읽으며 더 가깝게 만나볼 수 있다.
나는 가끔 희망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 가능성을 조금 맛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애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꺾일 때는 중독된 사람이 약물 기운이 떨어졌을 때 겪는 나락의 강렬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희망에의 열망은 더 강화될 뿐이다. 김희진이 도착하던 날, 그녀의 피곤에 지쳐 눈 감긴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희망이란 것에 감염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일생 동안 나를 지배하리라는 것도.
<회색 눈사람>
최윤 작가의 이야기는 각자의 방식으로 '겨우' 살아내는 이야기의 모음이지만 결코 허무하거나 무기력하지 않다. 그렇다고 '중꺾마!'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삶에서의 '겨우'가 '다시'가 되는 것은 아주 작은 틈새인데 최윤 작가는 대개 이 틈새를 그린다. 나 역시도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거대하고 요란한 무언가라기보단 아주 작은 틈새라고 생각한다. 그 틈새로 슬며시 빛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삶은 비로소 변화한다고 믿는다.
'작가의 말'을 슬쩍 엿보니, 최윤 작가는 진공과도 같은 침묵에서 글을 쓴다고 했다. 내면의 비밀스러운 미세한 데시벨을 놓쳐버릴까봐 방마다 돌아다니며 식구들에게 조용히 해줄 것을 요구하는 삶을 살았다고도 했다. 최윤 작가의 글을 읽어보면 이런 느낌이 뭔지 바로 알 수 있다. 정신 산만하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유가 가득해 멀티 태스킹, 더 나아가 다양한 부캐(요즘은 여기에 갓생살기까지 추가되어버렸다)를 장착하는 일이 진리이고 필수인 것만 같은 요즘 세태까지도 돌아보게 한다.
인간에게 있어 말하는 것은 본능일지 몰라도 읽는 것은 본능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수백만년이나 이어져 왔지만 문자가 개발된 역사는 5000년 정도로 비교적 짧다. 즉, 읽는 능력은 후천적으로 개발해야는 범위이고 한번 개발이 됐다가도 잘 쓰지 않으면 다시금 퇴보하기도 한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읽는 능력은 평생에 있어 가꿔가야하는 영역이라는 의미기도 하다. 성인이 되어 뇌 발달이 끝났으니 난 이제 끝이야!가 아니라 적절한 훈련을 통해 잘 읽는 뇌로 바꿔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전전두엽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전전두엽은 글을 읽는 행위와 관련된 인지 활동만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 수행되어야 하는 인지 활동 전반을 담당한다. 글을 읽지 않는 사람조차도 공부를 할 때든, 일을 할 때든, 하다못해 놀 때든 인지 활동은 필수적인데 이 부분을 효과적으로 트레이닝 하는 방법은 역시 책 읽기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읽어야 한다는 마음은 있는데 내 마음과 달리 집중이 안되어서 문제라면 오늘은 일단 입을 움직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