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책을 많이 읽어야 공부를 잘한다"는 문장은 때로는 참이고 때로는 거짓이지만 이 것이 참일 때 가장 큰 바탕이 되는 부분이 문해력일 것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보통 문해력이라 하면 국어 과목에만 상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공부의 기본은 교과서, 더 나아가 참고서인데 이는 모두 텍스트로 이루어져있어 문해력이 부족할 시 아무리 교과서와 참고서를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수학도 마찬가지인데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 더 나아가 출제자의 의도와 맥락을 파악할 수 없다. 쉽게 말해 "문장제"를 절대 풀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1이 2인 것은 알지만 이 문제가 1+1을 묻는 것임을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최소공배수'를 구하는 방법은 달달 외워 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공배수'가 대체 무슨 뜻인지, '최소 공배수'인지 '최 소공 배수'인지 '최 소공배 수'인지 구분할 수 없고, 최소공배수의 '공'이 공정을 뜻하는지 공평을 뜻하는지 공통을 뜻하는지 알 수 없으니 다음 단계에서의 응용이 어려워지고 '챗GPT가 있는데 수학공부가 왜 필요한거야?'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사회도, 과학도, 심지어는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 단어를 달달 외워도 그 단어의 뜻을 모르면 해석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alleviate'를 두고 '경감하다'라고 외웠는데 정작 '경감하다'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문해력은 여러 구성 요소를 지니는데 그 중 하나가 어휘력이다. 요즘 사람들의 어휘력 저하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이미 뉴스거리도 못된다. '금일'을 '금요일'로 안다거나 '사흘'을 '4일'로 이해한다는 얘기들은 이제 예시 축에도 못낀다. 어휘력을 향상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책을 읽는 일이다. 이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장 속에서 쓰이는 단어와 책 속에서 글로써 만날 수 있는 단어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밥먹어", "공부해"처럼 반복적으로 쓰이는 뻔한 말들 속에서는 아이나 어른이나 어휘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보면 된다.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고전적이긴 해도 종이 사전을 찾는 방법을 권한다. 스마트폰으로 온라인 사전을 통해 검색하는 일을 권하지 않는 이유는 역시 쉽게 딴 짓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사전을 펼치는 타이밍은 언제가 좋을까?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수시로 사전을 펼치기보다는 쭉 메모를 해두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찾는 것이 좋다. 장편의 경우에는 이 방식이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단편은 일단 앞 뒤 문장과 문단을 근거로,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유추(유추만으로 끝나면 안되고 추후 반드시 확인을 해야한다!)하면서 한번 쭉 훑는 식으로 완독을 하되 모르는 단어들을 따로 모아두었다가 이후 한꺼번에 찾고, 다시금 재독하는 방법을 써볼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하지만 한번 집중이 깨지면 다시금 집중하기까지 평균적으로 25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일단 읽을 때는 읽기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읽어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건 내 어휘력 수준과 맞지 않는 작품을 골랐다는 의미다. 조금 더 쉬운 어휘로 쓰인 작품을 찾아야 한다.
전체적인 맥락만 대강 알면 되지, 한두개 단어 모르는 것까지 꼼꼼히 신경써야하나? 싶을 수도 있다. 문학 작품은 기본적으로 예술성을 품고 있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보다 분위기, 혹은 뉘앙스의 파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뉘앙스의 파악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그런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다.
늦은 밤, 손님이 모두 떠난 카페에서 귀가 들리지 않는 노인이 술을 마신다. 지난주에 자살을 시도했다 실패했다고 한다. 젊은 웨이터는 자신의 퇴근을 지연시키는 노인이 싫다. ‘지난주에 죽어버렸다면 좋았을걸’ 이라며 징징거리는 젊은 웨이터와 달리 중년의 웨이터는 노인을 이해한다. 노인은 곧 카페를 나서고 젊은 웨이터도 퇴근한다. 홀로 노인의 테이블을 정리하며 중년의 웨이터는 생각한다. 노인은 왜 자살을 하려 했을까? 그것은 공포 때문도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그도 너무도 잘 아는 허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중년의 웨이터는 성스러운 단어들을 모두 ‘Nada’로 대체한 이상한 주기도문을 읖조린다.
Nada에 계신 우리의 Nada님,
당신의 이름으로 Nada해지시고, 당신의 왕국이 Nada하소서.
하늘에서 Nada하셨던 것과 같이 땅에서도 Nada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Nada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Nada한 것을 Nada하게 한 것과 같이
우리의 Nada를 Nada하게 해주소서.
우리를 Nada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Nada에서 구하소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릴까? Nada가 대체 뭘까? 대강의 뉘앙스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사실, 'Nada'는 스페인어로, '허무'를 뜻하는 단어다. 중년의 웨이터가 읖조린 이상한 주기도문의 'Nada'를 '허무'로 바꿔 다시금 읽어보자.
허무에 계신 우리의 허무님,
당신의 이름으로 허무해지시고, 당신의 왕국이 허무하소서.
하늘에서 허무하셨던 것과 같이 땅에서도 허무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허무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허무한 것을 허무하게 한 것과 같이
우리의 허무를 허무하게 해주소서.
우리를 허무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허무에서 구하소서…
단어의 명확한 의미가 채워진 기도문은 끔찍할 정도로 쓸쓸하다. 참을 수 없는 고독감과 서글픔 같은 것이 훨씬 더 깔끔하게 와닿는다. 단어의 명확한 의미와 어감을 알 때 뉘앙스가 더 확실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문학 작품에 있어서도 단어의 의미, 어휘력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노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허무였다. 바로 그 때문에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또 나름의 깨끗함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저 허무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일종의 피난처 같은 곳, 그냥 그런 장소가 지구상 어딘가에 딱 한 곳 있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헤밍웨이는 이 기도문에 방점을 찍는 방식으로 아주 짧은 분량 안에 허무를 신랄하게 꽉 채워 그렸다. 그 착잡한 여운 또한 아주 오래간다.
'Nada'라는 외국어 단어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Nada는 그저 하나의 예시였을 뿐,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글을 읽고 싶지 않고, 공들여 읽어도 내용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어휘력의 장벽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EBS 주관 중3 대상 ‘어휘력 진단 평가’에서 10명 중 1명만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교과서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어휘력을 갖춘 것으로 조사됐다. 반대로 말하면 10명 중 9명은 부족한 어휘력 때문에 자기주도학습 자체가 불가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자꾸 건너뛰다보면 종국에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어휘력은 꾸준한 읽기와 사전 찾기 활동을 통해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만회할 기회는 평생에 걸쳐 계속 있다. 그 기회를 붙잡을지 흘려보낼지를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