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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Oct 08. 2023

하브루타로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읽기

서머셋 몸, <점심>

한번은 단골 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책 깨나 읽는 사람들 중에도 단편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500쪽에 달하는 벽돌 같은 장편을 척척 완독해내는 사람들이 훨씬 짧은 이야기를 못 읽을 이유가 뭐냐고 반문하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대적으로 장편은 인물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이 착실하기 때문에 텍스트 위주로 일단 따라만 가면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반면 단편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넓고 얕은 것과 좁고 깊은 것의 대조랄까? 혹은 친절한 이야기와 불친절한 이야기의 차이랄까?


확실히 단편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보다는 사건이 흘러가는 모습 중간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소설을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본다면, 삶이 언제나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더 우리 삶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더욱 단편을 읽는 것이 살아가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단편이라는 한정된 분량 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없고, 욕심 내어 그렇게 하려다가는 문학적인 느낌이 퇴색되어 되레 이야기가 단조로워지기 마련이다. 꽁트가 될 수도 있고 우화가 될 수도 있다. 꽁트나 우화가 되는 길을 피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끝을 물음표나 말줄임표로 마치는 것일테다. 실제로 많은 단편들이 이런 식으로 끝난다. 우리의 삶 또한 상당수가 물음표나 말줄임표를 닮아 열려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인 마무리라 할 수 있는데 때때로 독자는 이게 끝..? 난 어디? 여긴 누구? 역시 단편은 난해하구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아마 이런 애매한 마무리가 싫어 단편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단편을 이런 식으로 끝내지 않는 작가들이 있긴 있다. <달과 6펜스>로 잘 알려진 서머싯 몸의 단편은 마침표로 끝난다.  "끝."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 와중에 몇몇은 꽁트같고 몇몇은 우화같지만 그래도 흐지부지, 혹은 갑자기 책장 페이지가 북 찢긴 것처럼 끝나지는 않는다. 이른바 '꽉꽉 닫힌 단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몸의 단편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으잉???? 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여성관이 말잇못이다. 몸의 단편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를 가히 짐작케한다. 그 중에서도 몸이 유독 더 여혐주자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특히 뚱뚱한 여자들에 대한 비하는 충격적일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몸의 단편 중 <점심>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사람의 팬조차도 아주 소중한 입장의, 별 볼 일 없는 작가다. 때문에 그는 "프랑스에 잠시 들르는 김에 작가님을 만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싶다"는 한 여성 팬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속으로 식비를 헤아려보는 주인공. '저는 본래 점심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간단히 맛만 보는 수준이죠.'라는 그녀의 말에 한숨 돌리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도 작가님을 만났으니 뭐라도 먹겠다며 한 가지만 먹으면 된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연어를 주문한다. 그런데 연어를 기다리는 동안엔 캐비어를 주문하고 캐비어와 함께 마실 샴페인을 주문하고 프랑스 파리까지 왔으니 아스파라거스를 안먹는건 서운하다며 아스파라거스를 주문하고 생각보다 많이 먹었으니 입가심이 필요하겠다며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거나한 식사가 진행되는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주인공은 존심을 세우느라 이 여인을 전혀 제지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줄줄 흘리면서 속으로만 욕을 해대는데 이 모습이 정말 우습다.


그 놈의 존심이 뭔지 끝까지 허세를 부리다 한꺼번에 한 달치 식비를 거덜낸 것은 결국 주인공 본인의 선택이었음에도 이 이야기의 결말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20여년의 세월 동안 그 날의 점심 식사 자리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주인공. 20여년 뒤 우연히 그 여인을 다시 마주쳤다는 그에게 친구들은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복수했냐고. 주인공은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게, 내가 복수할 필요도 없겠더라고. 이미 체중이 한 130kg는 되어보이던걸?"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우리도 여기서 ‘헐’하고 끝나면 그저 반쪽짜리 독서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크다. 하브루타 독서법을 한번 적용해보자. 하브루타 독서법은 주로 아이들 독서교육에 많이 쓰이는 대화식 토론법이다. 정답은 없지만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포인트다. 즉, 하브루타는 대답을 잘하는 능력보다는 질문을 잘하는 능력을 키우는데 특화되어있다. 질문을 하는 능력이 중요한 이유는 질문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고, 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끝도 없이 계속 열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간 ‘공부’라는 미명 하, 듣고 외우고 시험보고 잊어버리고를 반복해왔다. 이 영역에 있어 AI는 이미 인간을 능가한지 오래인데 그런 AI조차도 아직까지 질문은 하지 못한다. 그건 AI가 호기심이 없고 문제 의식이 없기 때문인데 사람은 이 두 개념을 기저에 둔 질문들을 통해 사고를 발달시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 즉, 한층 더 성장해나갈 수 있다.


그 여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초면에 염치없이 이것저것 먹어댄 행위도 분명 문제긴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작가의 주머니 사정까진 모르지 않았을까? 내가 덕질하는 작가니까, 그 작가의 실제 입지보다는 팬의 입장에서 '우리 작가님이니 이 정도 능력은 되겠지' 나 '곤란하면 어련히 거절하겠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당초 그런 부탁을 거절하거나 무리한 주문을 제지하지 못한 주인공의 문제는 없었을까? 주인공은 팬 앞에서 주제에 맞지 않는 허세를 부리려다 된통 당한, 치기 어린 찌질한 인물이다. 집에 가서 이불이나 걷어차는게 더 어울릴 인물인데 그에 반해 결말은 너무나도 한쪽으로 쏠려있다.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무신경함의 대가로 그녀는 무려 130kg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하필이면 뚱보가 되는 형벌을 받았을까? 고급 음식에 집착한 대가로 가산을 탕진하고 비쩍 골은 모습이 된 것으로 그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몸이 비쩍 골은 여자와 뚱뚱한 여자 중 후자를 더 비웃음 거리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하브루타를 통해 우리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작가의 취향 파악까지 해버렸다.


몸의 단편 대부분에서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이는 것은 맞으나 그 '인간'은 다분히 남성만을 일컫는다. 그 시절에는 책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대개 남자였어서 이런 일이 용인됐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이 단편들은 새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몸의 단편들이 대개 큭- 하고 웃을 수 있게 유머러스한 것은 맞는데 그 유머가 상당수 비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는 분명 비판의 여지가 있다.


짤막한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시대 감성이란 너무 파편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음도 안다. 사실 단편보다는 긴 호흡으로 긴 이야기를 끌어가는 장편에서 이런 것들이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긴 하다. 그 거대한 분량 내내 뭔가를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다. 그렇지만 단편도 계속 보다 보면 점차 이런 것들을 캐치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한번 슥 보고도 뭔가를 바로 알아채는, 일종의 눈썰미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 단편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눈썰미를 키운다는 것이다. 대놓고 텍스트로 표현하지 않은 것을 붙들어 메고, 더 나아가 책장 이면에 숨겨진 것을 알아챌 수 있는 힘. “일일히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만큼 너무 많은 정보가 매일같이 쏟아지는 세상, 모르면 당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려면 이런 힘이 꼭 필요해요!” 라고 굳이 힘주어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을 때, 세상은 한결 다르게 보이고 책읽기 또한 더욱 재미있어진다는 것만큼은 꼭 전하고 싶다. 나는 사고의 확장과 탐독(耽讀)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가 되면 문해력 또한 저절로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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