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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Oct 01. 2023

상상력과 공감능력을 키우는 읽기

케이트 쇼팽, <실크 스타킹 한 켤레>

꽤 많은 사람들이 단편을 장편으로 위해 징검다리처럼 거쳐가는 단계의 하나, 장편으로 향하는 길목 어디 즈음으로 평가한다. 단편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나는 지금 단편이 이런 평가를 받는 것에는 명칭의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권에서는 장편은 novel, 단편은 short story라는 완전히 다른 명칭으로 불리며 별개의 장르로 취급한다. 물론 그 동네도 어느 정도 단편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short novel이 아니기 때문에 novel을 평가하는 잣대로 short story를 보지는 않는다.


이런 명칭은 또 다른 혼선도 야기한다. '단편 소설'이라고 하면 마치 소설 중에서 길이가 짧은 것이 단편 소설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장편이 기본이고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5단계를 따라 흐른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으로 단편을 보게 되면 몹시 아리송해진다. 어떤 이야기는 시종일관 벽에 뚫린 구멍만을 묘사하다 끝나고(버지니아 울프, <벽의 자국>) 어떤 이야기는 직장인의 지긋지긋한 출근길과 간단히 때울 수 있는 아침 식사에 대한 얘기(김금희,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 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굳이 기승전결을 따지자면 기기기결인 경우도 있다. 기기기결은 그나마 양반. 기기기기인 것 같은 경우도 태반이다. 화자의 시선 혹은 의식의 흐름을 조용히 따라간다는 점에서 단편은 때론 수필을 닮았고 응축적이고 예술적이라는 면에서는 시를 닮았다. 뭐가 됐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장르인 것이다.


나는 이런 류의 단편들 중에선 케이트 쇼팽의 <실크 스타킹 한 켤레>라는 작품을 무척 좋아한다. 생각지도 못한 여윳돈 15달러가 생긴 서머스 부인은 간만에 백화점으로 나간다. 아이들의 신발을 살까, 아이들에게 셔츠를 만들어 줄 좋은 천을 살까, 아니면 딸을 위한 원피스는 어떨까, 원피스를 입으려면 긴 양말도 필요하겠지 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서머스 부인. 그런데 무심결에 가판대에 손을 얹었다가 실크 스타킹의 감촉에 반해 덜컥 실크 스타킹을 사게 된다. 실크 스타킹으로 갈아 신은 그녀는 스타킹에 어울리는 부츠를, 장갑을 연이어 사고 젊은 시절에 즐겨보았던 잡지도 한 권 산다. 그리고 길모퉁이의 식당에서 혼자 멋진 식사를 하고 연극까지 한 편 관람한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 그녀는 전차에 오르며 이 전차가 부디 멈추지 말고 그저 계속해서 끝도 없이 어딘가로 가주기를 바란다.


실크 스타킹 한 켤레에서 비롯된 그 날의 작은 일탈. 화자는 조용히 서머스 부인의 뒤를 좆는다. '위기'라면 서머스 부인이 부디 전차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그 부분 정도일까? 하지만 이 지점은 이미 '결말' 부분이다. 그리고 앞서 일탈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사실은 일탈이라고도 할 수 없을 수준의, 사건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전차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야반도주를 시도할 것도 아니다. 스타킹 한 켤레 정도 사는게 뭔 대수이겠는가! 스타킹을 훔친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을 판에.. 일반적인 '소설'을 보는 기준으로는 이 이야기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가슴 한 구석을 깊이 찌르는 것은 왜일까? 직접적으로 기술되어있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팔 벌려 그녀를 환영할 일상 속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 날의 일탈은 그저 하루의 꿈이었다는 걸. 하지만 우리는 또 안다. 이 날 그녀의 일탈은 단순한 과소비가 아니라는 걸. 그간 가족과 아이들에게로만 향해있던 시선을 이제 그녀 본인에게도 향하기 시작했기에, 이후 그녀의 삶은 분명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


단편을 읽는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직접적으로 쓰여지지 않은 것에 대한 즐거운 상상 속에 말이다.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문해력은 그저 빠른 눈치에만 기반하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 또한 필요하다. 상상력이란 터무니없는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라, 말로 설명할 길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해결책을 이리저리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내는 것 또한 모두 상상력에서 기반한다. 상상력이 터무니없는 공상이나 망상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으려면 그 기저에는 공감 능감이 있어야 한다. 그 상황에 처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헤아려보는 것,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범위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고 파악할 수 있어야 공감이 가능해서다. 이 개념은 일상 속에서는 ‘공감’이라 부르고 책읽기에 있어서는 ‘몰입’이라 부를 수 있다.


시각적인 컨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상상력이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고 있지만 책읽기는 상상력의 시계를 기꺼이 거꾸로 돌려줄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실크 스타킹 한 켤레>를 읽고 상상한 뒷이야기들은 내가 서머스 부인의 입장에 극도로 몰입한 것과 더불어 나의 내면 속에 유사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이 이야기를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분명 달라졌다. 나는 내 시선을 조금 더 내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단편은 오 헨리였다.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마지막 잎새>를 본 나의 감상은 단출했다. 어쩌라고? 죽었잖아ㅠㅠ(이 'ㅠㅠ'가 반드시 필요하다)였다. 이게 전부였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유사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머리는 다시 자라니까 머리핀은 나중에라도 쓸 수 있겠지만 시계는 팔아서 없어졌는데 시계줄이 대체 무슨 소용? 어쩌라는거? 였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 웃기고 깜찍한 감상이었던 듯한데 아무튼 이전의 나 또한 겪어봤기에, 단편에 익숙하지 않은 꽤 많은 이들이 단편을 접하고 내뱉을 첫 감상이 '어쩌라고?' 인 것도 잘 안다. 꼭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나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 '어쩌라고?'를 '어쩌라고?'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그 이야기 뒷면의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어쩌라고'를 '불쌍하다'로 구체화하고 '그래도 어떻게든 서로의 선물을 챙길 만큼의 사랑이 있으니 외롭지는 않겠구나' 를 덧붙여보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을 방 안의 남루한 풍경을 눈 앞에 떠올려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공감과 몰입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막연하고 감이 잘 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단편소설이 한 장의 스냅사진이라면 진짜 사람은, 그리고 진짜 삶은 그 사진의 바깥에 있음을 상기해보자. 우리의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단편이고 우리 모두는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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