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멈출 수 없었던 나날, 그리고 무너짐의 시작
나는 두려움 속에 있었다.
모든 게 낯설고 낡아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코로나는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고, LA와 뉴욕에서는 연일 사망자 숫자가 뉴스 화면 아래를 끝없이 흘러갔다.
그 무렵의 나는 말 그대로 혼자였다.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혼자라는 것이 익숙했던 나였지만, 그 시절의 고립은 다른 차원의 외로움이었다.
너무나 인간적인 욕심으로, 나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 있는 친척 언니, 고모, 가족들에게.
하지만 그들은 전화를 받지 않거나, 짧은 대화만으로 통화를 마쳤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 낯설었다.
피가 이어져 있어도 마음이 멀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LA에선 폭동이 일어났다.
나는 시장 관저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창밖으로 들리는 외침과 헬리콥터 소리에 밤잠을 설쳤다.
차를 뒤엎는 영상, 불타는 상점,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그 모든 것들이 바로 내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전 콤튼—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우범 지역에 살았을 때보다 더 무서웠다.
이건 범죄가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분노의 폭발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일했다.
정신을 붙잡을 유일한 수단이 일이었기 때문이다.
광고를 냈고, 의뢰가 들어오면 무조건 최선을 다했다.
클라이언트가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작지만 상징적인 결과가 찾아왔다.
1년 만에 LA 다운타운에 내 오피스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바로 그 앞, 오랫동안 동경만 했던 고급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다.
'이만하면 잘 해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무릎꿇고 하나님께 울며 기도를 드렸다 감사하다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아껴야 했다.
사업이 조금 잘된다고, 나는 그 돈을 마치 영영 계속될 것처럼 썼다.
회사를 통해 영주권을 받기 위해 쓸데없이 직원들을 고용했고,
고정비와 월세는 계속 올라갔고, 수익은 불안정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하려고 애쓰는 동안,
압박감은 서서히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 시절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실직 상태였던 사람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
우리 모두 외로웠기에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토요일마다 모여 바비큐를 굽고, 웃고, 서로의 외로움을 조금씩 덜어줬다.
나는 집에서 일했기에, 친구들이 오면 수영도 함께 하고, 하루쯤은 일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은 지금 생각해도 따뜻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허리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고, 이어지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움직일 수 없었고, 앉지도 못했다.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작업은 지연되었고, 클라이언트의 연락은 계속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화장실조차 혼자 가기 어려운 상태였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은 내 일상을 차단했고, 나는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 모든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렇게라도 멈출 수밖에 없었던 시간 같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그 고통이 아니었으면 나는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