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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Nov 05. 2023

이제 디자인 그만해야 하나?

"이사 잘하셨어요?"

"진짜 말도 마. 이삿짐센터 때문에 진짜... 하......"

차장님의 깊은 한숨에 그날의 일이 순조롭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차장님은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를 알아보고 있을 때 기간이 촉박해서인지 원했던 날짜엔 일정이 다 차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부동산에서 그 동네에서 오래 했다는 분을 소개해 주었고, 사장님은 허허 웃으면서 사람은 좋아 보였다고 했다. 그 동네에서 20년 넘게 했는데 뭐 번거롭게 그런 걸 쓰냐면서 계약서도 안쓴다는 데 별일이 있을까 싶어 믿고 맡기기로 했다고 한다.


이삿날 아침. 사장님은 또래 아저씨 2명과 함께 나타났고, 순조롭게 이사가 진행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도 주먹구구 방식으로 하는 바람에 이미 이사가 끝나야 할 시간을 훨씬 오바했고, 게다가 아끼는 고가의 물건을 분실했고, 가전제품도 훼손했다고 했다. 다행히(?) 얼굴 붉히지 않고 일부 금액을 변상해 줬고, 수리해 주며 일단락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차장님이 이야기했다. 

"오래 했다고 잘하는 건 아닌 거 같아"


그 말에 끄덕이면서 그게 요즘내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 창피해졌다. 대충대충. 이 업에 오래 몸담았다는 시간만을 가진 사람. 오래 버틴 사람이 이긴 것이라고 하지만, 오래 버텼다고 해서 실력이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다른 글에서 밝혔다시피 내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파견지는 정말 일이 없다. 월말에 일이 몰려있어 어떨 땐 2주 내내 디자인 업무가 한 건도 없었던 때도 있었다.


언뜻 들으면 아주 좋은 일 같지만, 막상 겪어보니 그렇지도 않다. 내가 받는 월급은 업무를 처리한 대가이기도 하지만, 자리를 지킨 대가, 그리고 내 실력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보상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연간 계약이 되어있고 매달 따박따박 이 대기업에서 내가 속해있는 회사에 돈을 줄 것이다.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니 내가 괜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몇 년 동안 혼자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다시 회사에 들어가니 매달 안정적으로 들어올 돈, 정해진 출퇴근 시간, 휴가, 대직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쓰지 않는 칼이 녹스는 것처럼 내 실력은 점점 무뎌져 갔고, 이제 2년이 되어가는 요즘은 현타가 자주 온다.


비주얼 퀄리티는 디테일로 결정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디테일은 정성으로부터 나온다. 이를테면 오브젝트 아래에 깔리는 그림자만 해도 그렇다. 하나만 깔아도 그림자라는 인식은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더 자연스러워 보이게 여러 레이어를 겹치고, 반사광 처리까지 하면 더 좋다는 것을 당연히 안다. 어떻게 하면서 더 좋은지 알면서도 이쯤 하면 됐지하는 부끄러운 일을 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 제휴사에 보낼 프로모션 페이지 디자인이 들어왔다. 나는 내내 우려먹던 구성으로 또 '그 나물에 그 밥'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같이 있는 디자이너와 하나씩 시안을 해서 보낸다. 분명 이전엔 내 디자인이 선택되면 내심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날은 디자인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하…내 것이 안 되면 좋겠다. 배너 베리에이션치는 것도 귀찮아‘

그렇게 작업한 시안이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른 디자이너의 시안이 채택되었고, 옆에서 그 작업이 이어지는 동안 유튜브 목록이나 새로고침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나 자신에게 너무 실망을 했다. 


그런데 지난 월말 작업을 하면서 나는 그런 실망스러운 나를 몇 번 더 마주해야 했다. 화면을 캡처 받아 전달해 주면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 보안 때문에 캡처 화면에 워터마크가 찍히는데 그걸 까맣게 생각도 못 하고 전달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럴 리가 없었다. 인지조차 못 하고 있다가 팀장의 말에 수정해 전달했다. ’나 왜 이러냐. 말 안 했어도 그런 것은 인지 했었어야지‘ 라며 자신을 다그쳤다.


배너 작업도 후다닥해서 서버에 올렸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고 나서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작업한 파일을 확인해 봤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파일명이 지난달로 표기되어 있었다. 지난달에 작업했던 파일을 바탕으로 제작했는데 저장할 때 파일명을 수정하지 않은 것이다. 부리나케 서버에 올려놓은 파일을 확인해 보았더니 거기엔 제대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차장님이 확인하면서 수정한 것이었다.

“아 차장님이 파일명 수정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아… 봤구나.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어.”


파일명 때문에 일에 차질이 생기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러는 거면 이해라도 하겠다. 근데 그 몇 건에서 정신 못 차리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다 되었나 보다라는 자괴감에 빠졌다. 이러면서 누가 일을 못 하고 어쩌고 하면서 떠들 자격이 있나...




그날 이후, 한동안 들어가 보지 않았던 사이트에 들어가 벤치마킹도 하고, 필요한 것들을 수집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다. 예전엔 좋은 것들, 훌륭한 것들을 보면 자극을 받곤 했는데 이젠 아무런 감흥이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디자이너‘라는 이름은 그냥 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일까? 


시무룩했지만 훌훌 털어버리고 그저 묵묵히 이 길을 가자고 나를 다독였다.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고 굳은살로 다져진 짬이 어디 가지 않으니 너무 좌절하지 말자고. 단지 고여서 썩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자 각성하며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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