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또는 그 이상을 대하는 엄마의 자세
인문교양서를 주로 펴내는 출판사에서 처음 편집자 생활을 시작했다. 첫 사수는 무려 편집장님이었고 음, 아주 혹독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한숨부터 나오는 맞춤법과 띄어쓰기 편람, 외래어 표기법 숙지. 번역된 원고에 누락된 문장이나 문단이 없는지 원서와 대조하다 급기야 말도 안되는 영어로 꿈을 꾸었던 일. 윌리보다 찾기 어려운 재쇄 찍는 책의 오탈자를 찾아 눈알을 팽글팽글 돌렸던 일 등등. 입사 후 3개월 동안 내게 벌어진 일들이다. 이후 회사의 자체 테스트를 통과하고 나서야 정식으로 책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 3개월은 일종의 인턴 교육 기간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편집자라고 불리게 되었고 초교, 재교, 삼교를 차근차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다시, 다시, 다시. 표지에 들어갈 문안 다섯 줄과 보도자료를 열일곱 번 이상 고쳐 써야 간신히 오케이 받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영업팀장님을 따라 완성된 책을 들고 언론사 홍보를 나가는 날에야 좀 살 것 같았다. 한 책을 마무리 짓는 의식과도 같은 그 짧은 나들이마저 없었다면 나는 기다리고 있는 다음 원고에 뛰어들 용기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의 책과 편집자의 책은 좀 달랐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그동안 편집장님이 여차저차한 일로 퇴사하고 사무실엔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참 부딪칠 때는 매우 악마적인 사수라고 생각했지만 '책임'이라는 화살이 좀 더 무겁게 날아들기 시작하자 그분이 내 소중한 우산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평가하기에 편집자 경력 2년차의 나는 절차에는 익숙하지만 인문학적인 소양과 센스가 부족했다. 여전히 누군가의 그늘에서 좀 더 배우고 책임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좀 더 가벼워지고 싶었다.
그때 마침 출판사에서 실용서 브랜드를 만들면서 경제경영팀을 꾸리고 새 팀장님을 영입했다. 인문단행본팀이었던 나는 500쪽이 넘는 교정지에 코를 박고 있었지만 귀는 그쪽을 향해 활짝 열어두었다. 새 팀장님은 이제까지 봐온 선배들에 비해 좀 더 현장의 냄새가 나는 분이었다. 저자들과 활발히 소통하고 0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며 한 권의 책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들도 대부분 연구자이기보다는 따로 생업이 있는 분들이어서 그런지 굉장히 역동적으로 일이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새 팀장님과 몇 번의 식사를 하면서 나는 팀을 옮겨 실용서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팀장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었다. 편집주간님의 승인이 나기까지 며칠을 들떠 있었는지 모른다. 본격적으로 기획을 배우고 저자들과 적극 소통할 수 있는 기회. 정말 '내가 만든 책'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경제경영팀으로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간님은 면담에서 신입인 나를 '인문서 전문 편집자'로 양성하기 위해 들인 공에 대해 이야기했고 몇 년은 더 인문팀에서 일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덧붙여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해되지 않는 말을 했다.
-나는 지금껏 수없이 많은 편집자들과 일해봤기 때문에 딱 보면 안다. 당신은 인문서 체질이다. 실용서로 뛰어든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경력인 척하는 신입의 처지일 것이다.
몇 달 뒤 나는 그 출판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악담인지 덕담인지 모를 그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출신 성분' 때문인지 어딜 가도 심각한 인문 계열 원고는 나에게 맡겨졌고 틈틈이 자기계발서나 에세이, 여행서 등을 만들었다. 그런데 해놓은 것을 보면 인문서에 비해 실용서들은 결국 책꼴은 갖췄는데 어딘가 내 맘 같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이런 자괴감을 두고 경력인 척하는 신입의 처지라고 표현했을까.
요즘 둘째를 보면 그 말이 때때로 떠오른다. 나는 첫째를 키우면서 벌인 실수와 쌓은 내공으로 둘째를 더 쉽게, 잘 키울 수 있을 줄 알았다. 태어나 가만히 누워 먹고 자고 싸기만 하던 시절까지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말하고 뛰고 본격적으로 요구하는 시기에 이르자 첫째와 다른 구석이 많았다. 사람 꼴은 갖추었으나 결이, 장르가 다른 존재. 내 아이라면 응당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나의 육아 연륜을 근거로 고집하는 것들이 둘째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사람들도 둘째보다는 첫째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했다. 먼저 키워본 사람의 경험담이 더 흥미롭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둘째는 그냥 첫째에 곁들여진 존재 같았다. 둘째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몇 살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첫째 전문 엄마’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자각이 생겼다.
둘째 앞에서 나는 아직 경력인 척하는 신입의 처지다. 운신의 폭이 넓은 진정한 경력자가 되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달리 없다. 둘째는 첫째 위주로 돌아가는 일상의 틈에 낀 존재가 아님을 되새기며 자꾸 관찰하고, 대화하고, 부딪쳐보는 수밖에.
그 시절의 나도 좀 더 버티며 공부하고, 쉽게 내 정체성을 규정했던 그 상사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왔어야 했다.
아이가 나를 뒤늦게 알게 한다.
인문서, 실용서 다 좋아한다.
나도 둘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