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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진영 Jun 25. 2021

나의 탄생

어느 가을이었다




가을이 깊었고 계곡 사이로 부는 바람이 찼다. 일주일 동안 진통을 한 산모는 아무도 곁에 없기를 바랐다. 아플 때는 혼자 있고 싶은 여자였다. 결국 사람들을 물리치고 혼자 아이를 낳았다. 8달을 겨우 넘긴 여아 아이는 검고 털이 많았고 작았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친척 노인이 태를 끊고 산모와 아기를 추슬렀다. 1974년 9월 29일 밤이었다. 


결혼한 지 아흐레 만에 남편을 따라 고향에 인사를 간 새색시의 출산이 흠은 아니었으나 소문은 대문 밖으로 빠르게 퍼졌다. 일주일이 되도록 눈을 뜨지 않는 아기를 두고 사람들은 장님은 아닌지 수군거렸다. 아랫목을 차지하고서도 여자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일주일 만에 눈을 뜬 첫딸을 데리고 보건소에 갔다. 몸무게는 2.6kg이었다.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여자는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직업 군인인 남편은 군산에서 올라온 어머니와 형 내외, 다섯 명의 조카들을 자기 집에서 건사하며 살았다. 여자는 아침저녁으로 열한 명의 식사를 준비하고 틈틈이 젖을 물리고 빨래와 청소를 했다. 아기는 해가 지면 서럽게 울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달을 채우지 못해서라고 가늠할 뿐이었다. 스물둘의 여자는 등에 업힌 아이를 흔들며 달래며 이불 몇 개를 쌓아 엎드린 채로 잠들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나 몇 해를 살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탄생의 순간과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일흔이 된 노모다. 스물둘의 얼굴이 희미하게 남은 엄마는 종종 슬픈 눈빛이 되어 과거를 늘어놓는다. 남편을 원망하고 시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살림 날 때 숟가락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는 형님과 아이가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고모를 아버지가 흠씬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나는 커피 한 잔을 타서 서둘러 방으로 들어온다. 매번 같은 이야기를 듣기 싫었고 여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서러움과 고단함을 외면하고 싶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시간이 오늘의 상처처럼 쓰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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