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꾸리고 다시 떠나는 날
경상남도 울주 어디쯤에서 1년을 살고 국수 공장을 떠나던 날. 작은 트럭에 세간살이를 모두 실은 후 운전석을 제외한 두 자리에 다섯 식구가 올라탔다. 세 살배기 막내는 아버지 품에 안겼고 그 옆으로 나와 여섯 살배기 여동생이 나란히 앉았다. 엄마는 발치에 자리를 잡았는데 잔뜩 웅크린 채였다. 먼 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까무룩 잠에 빠져 들었다 눈을 떠도 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엄마는 가끔 위로 올라와 굽은 등을 펴고 숨을 골랐다. 도착한 후 짐은 어떻게 내렸는지, 트럭 아저씨는 어떻게 돌아갔는지, 첫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의 고단한 표정과 아버지가 숨쉴 때마다 들썩이던 가슴 같은 것만 남아 있다.
도시에 급히 마련한 집은 대낮에도 밤처럼 어두웠다. 대문을 열고 몇 계단을 내려가 알루미늄으로 만든 현관문을 열면 더 깊은 어둠이 펼쳐졌다. 훅 밀려드는 습기가 싫어 숨을 참고 열 걸음쯤 재빠르게 안으로 달려가면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래도 그곳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가로로 긴 창이 나 있어 빛이 스몄다. 나는 가끔 서랍장 위에 걸터 앉아 창 밖을 올려다봤다. 구두 신은 아저씨, 치마 입은 아주머니, 리어카를 끄는 노인과 아이들의 작은 발이 지나갔다. 아홉 살배기의 나는 가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발을 올려다보는 순간마다 낯설고 슬펐다.
주민등록초본을 떼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터의 궤적이 연대기처럼 펼쳐진다. 갓난아기인 막내와 놀던 단칸방, 경남 울주의 사택, 성남 작은 골목 안의 지하방과 꼭대기에 자리한 첫 우리집. 신도시와 첫 아파트, 떠밀리듯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흔적과 홀로서기를 위해 찾은 오피스텔, 미군이 살았다는 작은 집, 물이 새는 빌라, 40년이 넘은 주택, 그리고 지금 사는 아파트. 기록은 기억을 부추기고, 나는 먼 길을 떠난 어느 오후를 떠올린다. 그림처럼 선명한 오래된 이야기,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이삿날에 갇혀 하루를 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