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기억을 꺼내다
가을날의 동화 같은 사랑은 아니었다. 한계를 모르는 감정들, 야윈 잎맥처럼 금세 끝장날 것 같은 신경들. 나는 너를 원해. 그 한마디에 담긴 욕망만큼 한 사람을 향해 쉽게 뜨거워졌다. 몇 개의 계절을 가로질러도 닿지 못할 세상에 각자의 삶을 풀어놓은 타인들에게 그것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잠들 때까지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 그 정도의 따뜻함은 허락될 줄 알았다. 외롭다고 말하고 등을 돌려 모로 눕는 사람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유난히 많은 눈이 내린 밤이었다. 골목길로 접어드는 인적이 드물어 눈을 발목까지 파묻히도록 쌓였다. 맹목적인 색이다. 흰 빛은. 경외하는 이방인처럼 조심스레 한 걸음씩 발을 떼었다. 살진 고양이 한 마리가 힐끔거리며 낮은 담 너머로 사라졌다. 골목 끝은 어두워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다가 칼날을 휘젓는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눈치를 채지 못할 터였다.
그래 괜찮아. 고민하는 너, 차가운 너, 돌아서는 너까지 다 기억할 거니까.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이다.
비가 오는 날이다
비가 온다.
비다.